우리는 슈퍼스타도, 챔피언도 아니니까.
샌드백 런지.
하이록스의 7번째 운동. 거의 다 왔다.
파트너가 샌드백을 목 뒤에 걸치고 먼저 런지를 시작 했다.
우리가 짠 작전은 단순했다.
각자 10걸음씩 런지를 하고, 교대. 그것뿐이었다.
생각보다 몸이 회복된 걸까, 의외로 파트너는 빠르게 런지를 이어갔다.
10걸음을 마치고 샌드백을 넘겨받았을 땐 “벌써?” 싶을 만큼 시간과 거리가 짧게 느껴졌다.
하지만 계획은 계획. 우리는 말없이, 정확하게 작전대로 교대했다.
10개씩 교대하니, 확실히 덜 힘들긴 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걸까? 라는 그런 생각이 슬며시 머릿속을 스쳤다.
작년에는 이런 작전 없이, 그냥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힘들면 교대하는 작전이었는데,
작년엔 샌드백 런지가 그래서 지옥에 가까웠었다.
그리고 곧, 작년 하이록스 대회가 떠올랐다.
여긴 하이록스 센터도, 크로스핏 박스도 아니었다.
대회장은 바닥에 충격 완화를 위한 패드를 깔 이유가 없는 곳.
샌드백 런지 구간도 평소 크로스핏 박스에서 운동 할 때 처럼 바닥의 반동을 이용해 무릎을 튀어오르게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었다.
탄성도, 쿠션도 없는 쌩바닥.
빠르게 하되, 온 다리에 힘을 꽉 줘야만 무릎이 다치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다.
반환점.
앞에 펼쳐진 남은 거리가 이렇게나 멀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다시 내가 10개, 파트너 10개,
또 내가 10개, 그리고 다시 파트너가 10개.
우리는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한 발 한 발 다리에 힘을 꽉 주고 딛다 보니,
점점 다리 전체에 묵직한 텐션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작년의 상황이 오버랩 됐다.
'아 이거 뭔가 잘못됐는데?'
다시 10개, 파트너 10개.
결국 힘든건 똑같았다.
파트너도 나도 허벅지의 텐션이 올라온 것 같았다.
우린 그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 진입했던 7번 스테이션의 아크가 가까워졌고 샌드백 런지를 마쳤다.
작년보다는 피로감이 덜 쌓인 느낌이긴 했지만 여전히 어떻게 하든 다리가 묵직해지는건 똑같았다.
파트너와 함께 록스존을 다리를 풀며 천천히 빠져나갔다.
이제 러닝 한 번과 마지막 스테이션 월볼샷만 남았다.
시계를 확인했다.
록스존.
8개의 스테이션과 러닝 코스를 이어주는 복도 같은 공간.
러닝과 스테이션 사이. 그 짧은 순간마다 숨을 고르고, 물을 마시고, 작전을 확인하고, 이 곳에서의 체류시간을 줄여야만 기록이 줄어드는 곳.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파트너와 함께 그 록스존을 천천히 걸어나오며 준비된 컵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시계를 확인했다.
작년 완주 시간까지는 3분이 채 안남았다.
아직 한 번의 1km 러닝과 월볼 100개를 던져야 하는 스테이션이 남았다.
생각보다 샌드백 런지에서 꽤나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여기서 죽을힘을 다해 뛰더라도 작년 기록을 넘긴다는건 불가능했다.
단 1초라도 기록을 줄인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머릿속에는 아까의 슬레드 풀 실수와 러닝 실수가 스쳐갔다.
파트너와 나는 물을 마시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우리 지금 죽을만큼 달려도 작년기록은 못넘겨요." 내가 파트너에게 말 했다.
".......시간 얼마나 지났어요?" 파트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1시간 12분이에요."
"아...." 파트너가 고개를 떨궜고, 시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우리 이번엔 완주만해요. 기록은 다음 11월 서울 대회 때 열심히 해서 세워봐요." 내가 말을 했고,
"예.. 그게 맞는 것 같아요." 파트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러닝존에 진입했다.
이제, 드디어 끝이 보이고 있었다.
어차피 작년 기록도 물 건너갔고, PB(Personal Best : 개인 최고 기록) 도 못 세운다.
그래서였을까. 묘하게 마음이 후련해졌다.
러닝 페이스는, 아마 이 마지막 러닝이 가장 느렸던 걸로 기억한다.
km당 6'05" 페이스.
대회 중 처음으로 6분대 러닝으로 달렸다.
이제서야 관중석들의 자신의 지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처음으로 우리를 응원와준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이제 마지막 월볼!" 이라고 소리까지 쳐줬다.
2바퀴 째, 다음 운동을 확인해야하는 전광판이 눈 앞에보였고,
칩을 인식 하는 발판을 폴짝 하고 뛰어 넘었다.
그런데, 왼발부터 착지하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미끄러운 것을 밟고 뒤꿈치부터 착지하면서 무릎이 반대로 꺾이는 느낌이 났다.
곧장 중심을 잡았다.
파트너가 화들짝 놀라며 "뭐야, 괜찮아요?"
"아 물 밟은 것 같아요. 괜찮아요." 내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무릎이 순간적으로 시큰 했지만 뛰는데 큰 불편함이 없었다. 그냥 순간적인 다리 풀림이었겠거니 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스테이션이다.
6kg의 메디신볼을 지정된 타겟에 던져서 맞춰야 하는 월볼샷 100개.
그리고 여기는 하이록스 경기장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참가자들이 가장 지친 상태로, 도착하는 곳이다.
그리고 가장 많은 심판들이 배치된 곳이기도 하다.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도열해 있는 듯한 느낌.
이곳만 넘기면, 스테이션 바로 뒤가 골인지점이다.
경기장 전체에서 가장 많은 시선이 몰리는 장소,
이 안에 들어서면 여러 가지 감정이 동시에 밀려온다.
주변에는 이미 공을 던지고 있는 사람들, 메디신볼을 껴안고 주저앉은 사람들,
그리고 지인들을 향해 소리치는 응원단들까지.
하이록스 스테이션 통틀어 가장 복잡하고, 시끄럽고, 희비가 엇갈리는 공간.
아무튼, 하이록스의 마지막 스테이션.
나는 메디신볼을 들어 올렸고, 타겟을 향해 월볼을 던졌다.
아까 꺾였던 다리는 조금 아팠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 것만 끝내면 완전히 끝이다.
처음엔 25개쯤 내가 던지고 교대할 생각이었다.
평소 9kg 메디신볼로 운동해왔기에 6kg짜리는 작년만큼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18개쯤 던지고 나니, 급격하게 지쳤다.
20개.
짧게 한 마디를 건넸다.
"교대."
파트너가 앞으로 나섰다.
메디신볼을 끌어안듯 들고, 한 개, 또 한 개, 타겟을 향해 던졌다.
던질 때마다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우리는 두 번 정도 더 교대했다.
진짜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제 완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내가 볼을 건내 받고 뒤에 있던 심판에게 물었다.
"몇 개 했나요?"
"85개요."
15개만 하면 끝이었다.
다시 던지기 시작 했다.
이제는 공을 던지는 것 보다 받아내는게 더 힘들었다.
5개를 지나 6개를 던졌을 무렵.
"노 랩!(No rep!)"
심판이 뒤에서 소리쳤다.
메디신볼이 정확하게 타겟에 맞지 않았으니 횟수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정신을 붙잡았다.
10개만 더 하면 된다.
다시 공을 들고 던졌다.
“노 랩!(No rep!)”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진짜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집중해야 했다. 거의 다 왔다.
"다 왔다!!!"
"힘내라!!!"
러닝크루 친구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응원과 함께 들려왔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끝까지!”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다 왔어요! 힘내세요!! 화이팅!!"
우리 뒤에 서있던 월볼 심판까지 화이팅을 해주었다.
남은 건 단 10개.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다시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온 몸이 타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10개.
심판이 외쳤다. 마지막 월볼이었다.
심판의 오른손에 있는 노란색 깃발이 오른쪽 골인 지점으로 향했다.
이제 다 끝났으니 피니시 라인으로 뛰어가라는 신호였다.
파트너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오른쪽 바로 앞에 골인지점도 보였다.
파트너와 달리기 시작했다.
한 번의 러닝 실수,
그리고 슬레드 풀을 다섯 번이나 끌어야 했던 그 실수까지.
파트너의 고통스러운 절규와 나의 고통들.
그 모든 걸 지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장 기뻤다.
우리는 함께 포효하며 점프했고, 그렇게 골인지점을 통과했다.
힘들었다. 하지만 기뻤다.
그리고 해냈다.
상반기에 있었던 마라톤 대회들과 파트너와 함께 운동했던 순간들도 스쳐 지나갔다.
잠시 숨을 골랐다.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앉았다.
아까 꺾인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모든 감각들이 여러가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이거 당분간 운동 못하겠는데 하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지만
일단 이 힘든 과정들을 모두 끝내서 너무 뿌듯했다.
"미안해요...." 잠시 뒤, 파트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내가 너무 못해서… 더 잘하고 싶었는데... 진짜 미안해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에요. 우리 최선을 다했어요. 포기 안했어요."
파트너의 “미안해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문득 2024년 JTBC 마라톤이 떠올랐다.
그땐 하이록스를 핑계로 러닝 훈련을 거의 안 했고,
2023년 춘천마라톤 때 서브4를 했기에 그 정도는 당연히 가능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몸은 21km이후 부터 무너졌고, 33km 부터는 완전 무너졌다.
결국 기어가다시피 하며 4시간 25분 만에 간신히 완주했다.
그때 너무 부끄럽고 분했던 감정이, 2025 서울 동아마라톤에서 PB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100%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파트너가 느끼는 감정이 그 때의 나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자신에 대한 아쉬움과, 나에 대한 미안함까지 겹쳐져 있는 그 표정이.
"우리 사진 찍을까요?"
단상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남기고,천천히 리커버리 존으로 내려왔다.
파트너는 많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물과 바나나를 하나 집었다. 그리고 파트너를 다시 바라봤다.
파트너는 고개를 떨군 채 조용히 서 있었다.
많은 감정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우리 11월엔 목표 시간 정하고, 제대로 훈련해서 다시 해봐요. 다음이 있어요."
파트너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이제 최종 기록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을 차례였다.
리커버리 존을 빠져나갔다.
"고생했어!!"
"아, 너무 멋있다!"
"이걸 어떻게 다 해!"
응원와준 러닝크루의 친구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응원와줘서 너무 고맙습니다."
진심이었다.
정말 힘들었고, 정말 고마웠다.
이제 우리의 기록을 등 뒤에 두고 사진을 찍을 차례였다.
발판위에 올라가니 우리의 기록이 나왔다.
우리는 운동선수도 아니고,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 사람들도 아니다.
더군다나 압도적으로 강한 사람들도 아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9to6의 시간 안에 열심히 살아가고
취미로 운동을 하는 직장인이자 생활체육인들이고,
그저 이 하이록스라는 이름 아래,
우리 인생의 가장 뜨거운 순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목표를 잡아 도전하는 30대 중반의 두 직장인이
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함께 준비했고, 실수했고, 끝까지 버텼다.
그리고 이 모든 순간들은,
우리에게 분명 하이라이트였다.
우린 이 경험으로 다시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2025년 11월 8일 하이록스 서울(HYROX SEOUL)
우리는 슈퍼스타도 아니고, 챔피언도 아니지만 다가올 하이라이트의 순간들을 위해 다시 또 도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