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파견 준비 5편.
지난주 수요일 퇴근 후 LG아트센터에서 일본 영화계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무성영화 <태어나기는 했지만>을 관람했습니다. 목소리가 없는 공백이 아코디언 밴드의 라이브 연주로 채워졌던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는 볼 때마다 참 신기합니다. 초반에는 느린 전개 때문에 막막함을 느끼다가도, 점차 몰입도가 증가하더니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에는 벅찬 감동과 공감을 느낍니다. 시대를 초월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다는 것. 최근에도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재개봉이 활발한 이유라고 느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형제는 친구들과 어울리는게 중요하고 자존심이 아주 강한 아이들입니다. 학교에는 두 형제를 괴롭히는 덩치큰 녀석 때문에 가기가 싫습니다. 집에는 무표정에 엄격한 아빠가 무섭습니다. 옆집 아빠는 참 친절하던데 우리 아빠는 왜 이럴까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한없이 무섭던 아빠가 직장 상사인 같은반 친구 아빠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스꽝스럽고 실없는 표정과 몸짓을 짓고 있습니다. 친구 아빠로부터 격려도 받습니다.
아버지의 '사회 생활'을 목도한 아이들은 너무 화가 납니다. 하필이면 같은 반 친구 아빠에게 굽신거리다니.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아빠를 겁쟁이라 비난하고 밥도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빠의 설명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음이 아프고 자존심이 상합니다.
"너 친구의 아빠는 내가 다니는 회사의 중역이야"
"너 친구의 아빠한테 월급을 받고 있어"
"이 문제는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평생 느껴야 하는 문제야"
(결말)
폭풍같던 시간과 냉전기가 지나고 화해와 이해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형제의 토라진 마음이 풀어지고,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하게 됩니다. 형제 앞에서 직장 상사를 만난 아빠에게도 무던하게 잘 다녀오라고 말해줍니다. 사람들의 깊은 탄식이 나왔던 장면입니다. 아빠는 잠시 민망했으나 또 다시 사회로 떠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역설적으로는 남에게 가장 보여주기는 싫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직장 상사로부터 온갖 짜증과 윽박을 감내한 경험, 외부인의 갑질에 허리를 굽히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은 다들 있을 것입니다.
회사원으로 살아 간다는 것, 더군다나 해외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는 것은 영화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회사 내외부에서 끝없는 상하관계에 놓이는 삶일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쯤 소중한 사람에게 이런 숨기고 싶은 모습을 보이게 되어 마음이 슬픈 날도 있겠지만, 그들도 언젠가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 일본어 원 제목은 「生れてはみたけれど」, 직역하면 "태어나보기는 했지만" 입니다. 한국어 제목인 "태어나기는 했지만" 보다는 좀 더 주체적인 표현이네요.
#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도쿄의 황혼>에 이어, 이 영화도 가족이 도쿄의 교외로 이사오면서 시작됩니다. 오즈 야스지로의 도쿄를 내년에 가게된다니!
# <대학은 나왔지만>, <낙제는 했지만> 이라는 영화도 있는데 내용이 궁금합니다. 일본에 가면 볼 수 있는 곳들을 찾아다녀볼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