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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쓰는 법] 11.같이 가보고 싶게 만드는가

by 엄지혜
언스플래쉬


같이 가보고 싶게 만드는가

- 강소영 위즈덤하우스 편집자


오래전 시나리오 잘 쓰기로 정평이 난 한 영화감독으로부터 ‘사과 박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공모전에서 심사할 때 첫 한두 장을 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사과 박스로 던진다는 이야기. 강소영 편집자는 ‘투고’라고 이름 붙인 자동 분류 메일함을 열어볼 때마다 가끔 이 사과 박스를 떠올린다.


"투고 원고가 책이 되는 일이 확률상 드물고, 어떤 면에서 기적 같은 연결이잖아요. 출판사 투고 담당자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혹자에게서 온 글을 열어보고 진지하게 검토할 때, 어떤 신비가 작용할까요? 간혹 수신자에 여러 출판사의 이름이 적혀 있는 투고가 있어요. 바로 '사과 박스’ 행이죠. 메일에서 출판사나 책에 대한 관심이 느껴진다면 호감이 생기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면? 수신자를 제대로 썼는지부터 메일 내용, 심지어 기획안 첫 장의 서체나 위계 같은 파일의 만듦새까지, 많은 요소가 이 기적 같은 만남의 첫인상을 좌우합니다. 어찌 보면 첫 독자인 투고 담당자가 일단 원고를 열어보게, 계속 읽어보게 하는 것이 투고에서 가장 중요하겠죠."


종종 원고를 읽어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가 있다. 어울리는 출판사에 추천하기도 하고, 개고 방향에 대한 의견을 주기도 하고, 출간한다면 어느 방식이 좋을지 같이 고민하기도 한다. 고 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영 저자의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는 이처럼 리뷰를 하다가 원고를 맡기로 결심한 경우다.

"누가 봐도 책이 될 만한 기획을 준비하는 것이 투고의 정석 같겠지만, 처음부터 완성도에 방점이 있는 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모든 초고는 거칠기 마련이고 사방팔방 다른 길이 날 수 있어요. 같이 가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 먼저지요."


강소영 편집자는 '이 문제가 다른 문제에 연결된다', '이 존재가 다른 존재에 연결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글을 좋아한다. 독자들을 움직이는 글을 책으로 엮고 싶다. 접점이나 움직임을 시장의 논리로만 본다면 공감이나 확장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텐데, 그것과는 좀 거리를 두고 싶다. 독자로 하여금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틀어보게, 낯선 길로도 가보게 하는 책을 추구한다.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찾는 책이 되는 것은 결과이지 목표가 아니다.


"누군가 아주 내밀한 자기 이야기를 글로 썼더라도 그것이 책이 되는 순간 더는 자기만의 비밀이 아니잖아요. 안에 있던 것을 책으로 꺼냈을 때의 반향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출판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이 책이 누구와 연결될 것인지, 무엇을 움직일 단서가 될지 궁금해하고 기대하면서 책을 엮어가는 거죠.”


논픽션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과 진실에 대한 검증’이라고 생각한다. 전문서의 경우 저자가 그 주제나 분야에 대해 전문성을 지녔는지를 반드시 봐야 하듯, 르포르타주 등의 논픽션은 당사자를 포함해 유관한 사람들의 진술과 정황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밀착적으로 취재한 뒤 작성해야 한다.

"저자의 자격을 떠나 검증을 소홀히 한 글은 위험하고 유해할 수 있잖아요. 스스로 경계하고 돌아보는 과정이 담긴 책은 본문 문장이 쉽게 읽히지 않아 자꾸 덜컥거리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을 줄 때가 많아요. 꼭 본문이 아니더라도 주석이나 참고문헌의 세세함에서도 짐작할 수 있죠. 저는 이 복잡하고 덜컥거리고 세세한 책에 감동하는 편이에요. 세상에 완벽하고 완전한 책은 없겠지만, 허투루 쓴 글이 아니고 허투루 만든 책이 아니라는 믿음을 서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리디아 데이비스는 『형식과 영향력』에서 메모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실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 혹은 자기 자신에게 엄밀한 정확함을 요구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몇 시간만 지나도 확실한 지식에서 얼마나 많은 것이 사라지는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새뮤얼 존슨의 말을 인용해요. 잘 검증한 사실과 진실조차도 시간이 흐르며 뒤바뀔 수 있죠. 그래서 더욱이 그 순간 최선을 다해 엄밀히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비 저자들에게는 "어떤 글이든 세상에 내보내기 전에 주변의 한두 사람에게 먼저 보여주라"고 당부한다. 책을 쓰고 싶다면, 이 일을 귀찮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집을 나서기 전 전신 거울에 나를 비춰 보듯, 내 안에서 밖으로 글을 내보낼 때는 거리를 두고 비춰 보는 습관이 큰 도움이 된다.


"세라 망구소의 『300개의 단상』에 이런 문구가 나와요. '우리는 인간의 괴상한 버릇을 볼 때마다 그것을 병리화할 게 아니라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 사람은 자신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 계속 살아갈 방법임을 알아낸 예비 저자들을 응원합니다. 현장에서 만나 뵙기를 바랄게요."



� 강소영 위즈덤하우스 편집자

마티, 후마니타스 등을 거쳐 위즈덤하우스에서 논픽션팀을 맡아 책을 만들고 있다. 주로 사회과학·인문·예술 책을, 때로 소설·실용·자기계발 책을 만들었다. 영화 기획·마케팅 일을 하다가 출판 편집자가 된 이력을 설명하기 위해 ‘콘텐츠 제조/서비스 노동자’로 소개하곤 한다. 만든 책으로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타오르는 질문들』,『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김군을 찾아서』, 『원본 없는 판타지』, 『배틀그라운드』 등이 있다.

인스타그램 위즈덤하우스 도서(@wisdomhouse_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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