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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쓰는 법] 6.큰 서사를 그리는 능력이 있는가

by 엄지혜 Jan 15. 2025
언스플래쉬


큰 서사를 그리는 능력이 있는가

-  이진 사계절 편집자



편집자는 누구보다 세상의 새로운 소식에 눈을 반짝이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책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처음 접하는 이야기, 주목받지 못했던 현장, 흔치 않은 경험, 다르게 보는 방식' 등을 눈여겨본다.

장애를 ‘극복하고’ 위대한 성취를 이룬 인간 승리의 드라마가 소비되던 시대에 “나는 한 번도 장애를 극복한 적이 없다”라며 욕망하는 주체로서 자신을 당당히 드러냈던 김원영 작가(『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종이사전이 저물고 웹사전이 시작되던 시기에 네이버와 다음에서 처음 웹사전을 구축하는 일을 했던 정철 작가(『검색, 사전을 삼키다』, 어른들이 만드는 팟캐스트 방송에서 혼자 열심히 어린이 이야기를 하던 김소영 작가(『어린이라는 세계』 등의 사람을 알게 됐을 때, 이진 사계절 편집자는 "저 사람의 이야기가 책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몇 편의 글보다는 필자의 고유한 경험이나 전반적인 가치관, 태도 같은 것들에 제가 온전히 공감하고 호기심을 느꼈을 때 책을 만들 결심을 하지 않나 싶어요. 물론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요. 조금 모호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래서 내가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많이 생각하는 편입니다. 본격적인 편집 단계에 들어가면 글 만큼이나, 같이 일을 진행해나가는 사람들이 서로 믿고 의지하며 편안하게 소통해나가는 부분이 중요하니까요."


제대로 책을 만들고 싶은 저자라면, 글쓰기에 앞서 자신이 쓰려는 주제나 분야에 관한 연구, 활동, 취재, 조사 등을 성실하게 해야 한다. 글을 잘 쓰는 능력과 별개로, 책을 쓰고자 하는 분야에서 경험하고 탐구하며 얻은 고유한 자원이 부족하다면, 단행본 한 권을 끝까지 끌고 가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분야에서 앞서 나온 책들을 충분히 읽고, 관련 종사자들과 의견도 나누면서 자기 관점을 세우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책이 출간된 뒤에는 세상 곳곳의 다양한 독자들로부터 예상치 못한 질문이나 의견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응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한 관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단계라면, 지식이든 경험이든 자신이 가진 것들 중 어떤 것을 꺼내 이야기의 덩어리를 만들고, 그것이 책 전체의 주제로 향하게 할지 '하나의 큰 서사를 그리는 능력'이 중요해요. 책의 세부적인 장이나 부를 구성하는 것은 편집자와 함께 해나갈 수 있지만, 그에 앞서 저자가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이고 그와 관련해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엮을 것인가 하는 큰 구조를 세울 수 있다면 집필도 편집도 한층 수월할 테니까요. 논픽션을 읽는다는 건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더불어 그것을 구현해낸 저자의 고유한 스타일이나 관점을 읽는 일이에요. 그런 만큼 문체든 태도든 세계관이든 저자의 개성이 책 전반에 걸쳐 자연스럽게 묻어 난다면 더 바랄 게 없죠."

올해로 19년 차 편집자가 됐지만, 투고 원고가 출간 계약으로 이어지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투고를 살펴보면 출판사의 출간 목록과 거리가 먼 분야나 주제의 글을 보내시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밖에는 개인의 경험을 기록하거나 직업적 성취를 정리하는 차원의 글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개인의 경험과 성취는 물론 다 소중하지만,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우리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저자가 보여줄 수 있어야 해요. ‘나’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할 수 있어야죠. 또 책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가 분명해야 하고요. 편집자들은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지금 우리 사회의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문제인지, 그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나 관점을 환기하는지, 혹은 미래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이야기인지 같은 것들을 판단해보곤 합니다. 단지 책을 내고 싶다 거나, 그간의 연구나 활동을 정리해보고 싶다는 정도의 생각이라면 편집자도 독자도 설득하기 어렵습니다."

2020년 출간된 김소영 작가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가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가 되면서 사계절 출판사에는 어린이, 청소년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의 투고가 잇따랐다. 각자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귀한 이야기였지만 출판 계약으로 이뤄진 경우는 없었다. 대개의 원고가 현장의 일화를 전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어린이라는 세계』가 많은 독자와 만날 수 있었던 건 김소영 작가가 독서교실 안팎의 여러 일화를 통해 사회 속 어린이의 존재를 온전한 인격체로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새롭게 환기하고, 어린이를 둘러싼 여러 겹의 세계를 폭넓은 시선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논픽션 저자에게는 개개의 일화 너머를 이야기할 수 있는 눈과 그 시선을 책 전반에 걸쳐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꼭 필요해요."

인문팀에서 일하는 이진 편집자는 최근 투고 원고 하나를 발견하고 필자와 몇 차례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원고를 조금씩 수정해보고 있다. 이 원고를 골라 살펴본 이유는 "특정 분야에서 확보한 저자의 전문성과 경험, 인접 분야까지 아우르며 어렵지 않게 글을 전개하는 솜씨, 필자 나름대로 구성한 틀과 거기에 담긴 주제 의식"이 제법 탄탄해 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바로 출간을 진행해보자고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도 있어요. 한 편 한 편의 글이 일정 수준 이상의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지만, 저자가 잘 드러나지 않았어요. 공부하고 취재하고 인터뷰한 결과를 정리하는 데 중점을 두다 보니, 원고 전체에 걸쳐 움직이고 생각하고 말하는 저자가 보이지 않게 된 거죠. 그래서 제 나름대로 수정 및 보완을 위한 의견을 드렸고, 다행히 필자께서 다시 써보겠다고 적극적인 응답을 주셔서 수정된 원고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과연 이 원고가 책으로 나올 수 있을지 저도 궁금합니다. (웃음)"



"책을 쓰는 것이 책의 목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평소 글쓰기 연습은 꾸준히 하되, 책을 위한 원고는 내가 세상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해졌을 때, 그리고 그것을 충분히 잘 쓸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을 때 시작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 이진 사계절 편집자

사계절출판사 인문팀에서 일한다. 2005년부터 편집자 일을 시작해 19년 차가 됐다. 인문사회 분야와 에세이 등 주로 논픽션 책을 만들어왔습니다. 많이 알려진 책으로는 『어린이라는 세계』,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이보그가 되다』 등이 있다.

인스타그램 사계절출판사(@sakye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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