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전환기(turning period)를 건너갈 때 영감을 준 사람, 그런 존재를 멘토, 스승이라고 부른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남편과 은사(직장상사이기도 한)이다. 은사는 그렇다 해도 설마 남편이 멘토라니? 정말이야? 과연? 주변 지인들의 첫 반응은 다들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내게 있었던 두 번의 전환기는 바로 이 두 사람이 있었기에 무사히 건너갈 수 있었다. 이번에는 첫 번째 전환기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1st. turning period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4년간의 통제된 사관학교 생활 끝의 염증과 견고한 군이라는 울타리 때문이었을까? ‘열정’, ‘삶의 목표’, ‘인생계획’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답답했다.
매일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 ‘저녁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수레바퀴 아래에서, 헤르만 헤세>는 마음이 들었다. 당장 바람처럼 날려버려도 아깝지 않은 인생처럼 오늘 하루만 존재하는 것처럼 살았다. 출근할 때는 한치의 빈틈도 없을 것 같은 단정한 간호장교지만, 퇴근 후 나는 또 다른 삶을 사는 것처럼 살았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겠다면서 나이 많고 센(요즘 용어로) 언니들과 몰려다니면서 내가 있는 곳 그 밖의 세상을 경험하는 데 열중했다. 그때 분명히 나는 스스로를 케어하고 있지 않았다. 당시 내가 손에 늘 들고 읽었던 책은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때 나는 너무 익숙해진 페로소나 만큼 짙어진 반대편의 그림자를 만나고 있었다.
내 인생 첫 번째 멘토
이때 내 인생 첫 번째 멘토가 되어 준 남편을 발견했다. 우리는 내가 26살이었던 1997년 가을,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을 약속하고, 3개월 동안 결혼 준비를 했다. 이것저것 생각할 틈도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24년 전 34살 노총각이었던 남편은 결혼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8살이나 어리고,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먼 나와 결혼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궁금증은 남편과 결혼생활을 이어가며 더 커졌다. 남편은 티셔츠 하나를 살 때도 한번 만에 구입을 결정하지 않는 극 신중파이다. 한 번 보고 며칠을 생각하다가 확신이 들면 가서 구입을 했다. 나와는 정반대였다. 그런데 3개월 만에 결혼식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냥 “나를 너무 사랑했던 거지” 하고 우스갯소리로 넘겨보지만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남편에게 몇 번 물어봤지만 아무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면 정작 당사자인 나의 이유는무엇이었을까? 실은 이것도 한참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런저런 이유로 옮겨갔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면 ‘군(army)이라는 울타리로도 통제되지 않는 나를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구명구 같은 존재’로 남편과의 결혼을 선택했던 것 같다. 저녁노을처럼, 바람처럼 사라지고 싶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싶기도 한 이중적인 욕구의 딜레마. 애초에 생에 대한 강한 애정이 없었다면 사관학교에 입교하는 도전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남편을 통해 안전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남편은 양가 부모님의 상견례가 끝나자, 대학노트 한 권을 건넸다. 표지에 ‘결혼 준비’라는 네 글자가 단정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그날부터 남편은 나를 앞에 앉혀놓고 결혼에 필요한 항목들을 적고 세부적인 실행계획 세웠다. 지나치게 세심한 남편에 비해 심드렁한 내게 웨딩드레스에 대해 조사를 해오게 하더니 어느 날 나를 앞세우고 이대 앞 아현동 웨딩드레스샵 30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한 일주일 걸렸다. 요즘 같으면 이걸로 웨딩드레스 고르는 노하우 전자책을 발간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남편은 국자 같은 작은 살림도구를 사는 것부터 신혼집을 구하는 것까지 세세하게 기록했다. 우리는 양가 부모님의 도움 하나 없이 결혼 준비를 하였다. 부모님들은 상견례 이후, 아무것도 안 하고 결혼식 당일 날 참석만 할 정도였다. 남편의 직업은 TV 방송 PD이었다. 결혼식을 자기가 제작하는 프로그램 정도로 생각한 건지, 나를 스태프로 해서 ‘결혼식’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은 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며, 균형감과 성실함을 끄집어내어 일상을 충실히 꾸려나가자고 열심히 설득했다. 나는 그 시기를 마치 터널을 지나는 고통스러운 느낌으로 기억한다. 내 건너편에 있는 것 같은 일상과 안정적인 삶을 찾아 선택한 남편은 그 기대에 부응하여(역설적이게도) 끔찍할 정도로 나의 변화를 요청하고 또 요구했다. 당시 어디 말할 때도 없어서 5살 밖에 안된 딸에게 20년 뒤에 읽게 한다며, 매일 일기를 썼다. 얼마 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온통 남편에 대한 원망과 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 찬 내용이었다.
체념과 수용
터널을 지나듯 고통스러운 결혼 5년 차를 넘기고 2003년 봄, 내가 이제는 어느 정도 일상적이고 모범적인 것에 익숙해졌다 느낄 때 즈음, 남편이 한마디 했다.
“사람은 참 안 변하는 것 같아. 이젠 포기하려고. 나도 더 이상은 힘드네.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
“아니!!! 내가 얼마나 딴 사람이 됐는데, 사람이 안 변한다니! 내가 그대로라니!”
원래, 남편은 나에게 멘토가 아니라 나를 가두는 울타리였고, 벽이었다. 내 날개를 꺾어서 조롱에 가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나는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를 가두었다는 자책감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래서 남편은 오히려 갈등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숙고해보면, 나는 내 안의 그림자를 만나 통합하는 과정이었고 내 옆에 있어준 유일한 한 사람이 남편이었다. 방종과 엄격함 사이에서 성실과 균형감을 통합해낼 수 있었다. 그 후, 남편으로 인해 최초 채굴이 시작된 내 안의 성실함과 균형감은 쑥쑥 자라났다. 나는 다음의 세 가지를 배우며 조금은 성숙해져서 20대에서 30대로 건너갔다. 살아야 하는 절대적 삶의 의미, 일상의 소중함, 사랑의 책임감.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