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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돼지 vs 멧돼지

돼지고기를 멜젓에 찍으며...

by 심색필 SSF

“야... 역시 고기는 돼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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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


회식에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메뉴 중 하나가 되어버린 소주 한잔에 삼겹살 한 점. 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요즘 시대에 한때 서민의 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던 삼겹살마저도 준 귀족 음식이 되어가고 있다.


“이게 확실히 이베리코라서 그런지 맛이 좋긴 하다. 그런데 이 이베리코는 왜 더 비싼 거냐?”

“도토리를 먹인다나? 그런데 기본적으로 이게 멧돼지야.”
“멧돼지가 돼지보다 더 맛있나?”

“그럼. 멧돼지는 그래도 야생이잖아. 온실 속 화초로 자란 애들이랑 다르지.”


온실 속 화초. 야생. 살다 보면 그런 걸 따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단순히 집안이 어떻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그런 이야기들.


“요즘 것들은 굶어보지 않아서 헝그리 정신이 없어.”

“나 때는 말이야. 정말 먹을 게 없어서...”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더 강하다는 그런 이야기를 어른들에게서 흔히들 듣고는 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종자들이 더 강할까?


“야. 멧돼지 그 사이즈를 봐라. 아기 돼지 삼형제가 진화해 봤자 저팔계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데. 돼지 하나 키워서 이윤을 만들어야 하는데 최대한 크게 만들어야지. 아무리 운동 많이 해봐라. 경량급이 헤비급 이기는 거 봤냐?”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흔히들 우리가 많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듣는 주제이다. 평생을 운동한 경량급 선수와 타고나길 헤비급으로 태어나 한 번도 운동을 하지 않은 거인의 싸움에서 과연 누가 승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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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능프로그램 '아는 형님' ]


“자... 봐봐. 너는 평생을 격투기를 했잖아. 그러면 싸워서 호동이 이길 수 있어?”


예능 프로그램 아는 형님에서 격투기 선수 정찬성이 출연했을 때 패널들이 그에게 했던 질문이다. 과연 둘이 진심으로 싸우면 누가 이기게 될까?


“야. 너 운동 안 해봤지? 싸움에 체급이 괜히 있냐? 왜 싸움에 굳이 체급을 나눠놨겠어?”
“저 상대가 강호동이라서 그렇지 그냥 뚱땡이들은 그냥 이기지.”

“아... 그냥 뚱땡이들 말고. 체격 좋고 힘 좋은 애들 있잖아. 타고나기를 그렇게 자란 놈들. 그런 애들은 못 이겨. 다들 태어난 대로 사는 거야. 아무리 사자가 싸움을 잘해봐라. 코끼리 이기나?”
“그건 종이 다르잖아. 그리고, 그렇게 치면 담비 모름? 그 족제비 만한 놈이 멧돼지도 잡아먹는데. 덩치가 다가 아니라니까?”

“아이. 사이즈가 압도한다니까?”

“아니. 기술이지. 인마. 하여간 꼭 기술 없이 힘만 믿는 놈들이 이래요.”
“힘도 없는 것들이 꼭 입만 살아서는.”

“그럼 뭐 맞짱 한 번 뜰까?”

“들어와.”


분명, 어떤 돼지가 맛있냐에서 시작한 말이지만 술 한 잔이 들어가고 괜한 일로 커진 목소리는 서로의 호승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이런 논쟁은 꼭 싸움과 결투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공부에서도, 예술에서도, 스포츠에서도, 사업에서도 꽤나 여기저기에서 쓰이는 논쟁의 거리인 것 같다.


재능 vs 노력

엘리트 교육 vs 자연 성장

이기기 위한 싸움 vs 살기 위한 싸움


결과를 까보기 전까지 모르고, 결과를 안다고 해도 단편적으로 무엇이 좋은지에 대해서 확언할 수 없는 그런 논쟁들. 누구의 말이 옳냐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는 그런 보기들이 있다.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재능’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가고, 엘리트 교육을 이겨내 본 경험이 없기에 방목형 스타일인 자연성장을 추구한다. 분명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살아가기에도 턱없이 벅찬 세상인데 여기서 누군가를 이겨내야 한다는 경쟁의 부담까지는 감내하기 싫기에 그냥 생존을 위한 싸움까지만 하는 것으로 내 삶을 타협한다.


“어떻게 보면 조금 나태할수록 자기를 대변할 수 있는 보기를 고르는 거네?”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냐?”


뭐... 원래 자기 입에 맞는 것만 먹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 아니겠는가? 적당히 생존으로부터 보호는 받되 자유는 누리고 싶고. 누군가를 싸우고 이겨내면서까지는 살고 싶지는 않으면서 적당히 나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살면 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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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트러버 뉴스 이미지 _ 이베리코 돼지 ]


“이베리코 돼지네.”
“어?”

“그게 이베리코 돼지라고.”

“아까는 멧돼지라며.”

“멧돼지긴 한데 개량된 품종이기도 하고 산, 숲, 야생에서 방목하면서 서식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가축화가 된 돼지래.”
“뭐야? 그게? 그럼 멧돼지라는 거야? 아니면 집돼지라는 거야?”

“둘 다지.”

“야. 멧돼지면 멧돼지가 집돼지며 집 돼지지. 그딴 혼종이 어디 있냐?”

“니 앞접시 위에 있네.”


그렇게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았던 돼지는 결국 인간에게는 돼지고기 그 이상도 기 이하도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털이 벗겨지고 잘 도축돼서 불이 맛있게 그을린 다음 지금 내 앞의 파절임 접시 위에 그 자태를 드러낸 돼지고기. 음식 그 이상, 그 이하의 가치도 아닌 고기.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우리 또한 이 돼지랑 비슷하지 않을까?


“진짜 요즘 것들은...”

“하여간 꼰대들이랑 말이 안 통해요.”

“노력도 안 하는 새끼들이랑 무슨 얘기를 하냐?”

“불평등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더 노력을 해? 어차피 정답은 정해져 있는건데.”


돼지는 돼지로 태어났기에 돼지의 운명을 살아야 하는 거고,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으로서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는 걸로 그 운명을 끝내야 하는 건가? 집돼지로 살 것인가? 아니면 멧돼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사는 이베리코로 살 것인가? 어차피 불판 위에 올라갈 운명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돼지들은 그렇게 꿀꿀되면서 입에 이런저런 음식들을 처넣으려고 서로 그 큰 이빨을 드러내고 서로를 위협했을까? 죽음이라는 결론 앞에 우리는 다 똑같은 인간인데 왜 그렇게 싸우나 싶기도 했다.


A cow and a pig are sitting in a courtroom with pitiful expressions on their faces, and people are l 23-04-2025 at 13-28-56.jpeg


“죽기 전까지 돼지가 지 운명을 알았겠냐? 그냥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다 갔으면 된 거지. 뭐... 돼지만 그래? 닭이랑 소가 더 불쌍하지.”

“소가 더 불쌍해? 그래도 돼지가 더 불쌍하지?”

“소가 더 불쌍하지. 평생 인간을 위해 일하고 충성을 다하고도 죽는 날까지 그 모든 걸 다 바치면서 죽잖아.”

“돼지가 더 불쌍하지. 인간이 제일 멸시하는 동물이잖아. 소는 특정 문화권에서 우상숭배라도 당하지. 돼지는 다른 종교에서는 완전히 버러지 취급까지 받는데.”


돼지가 먹이를 더 많이 먹기 위해 매일같이 경쟁하는 동물이라면 아마 인간은 자신의 말과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싸우는 동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배가 부른데도 쉽게 흥분하고 싸우는 것 아닐까? 더 배부르기보다는 내 말이 맞다는 걸 인증하기 위해서. 상대를 누르면서까지도 말이다.


“근데 난 정찬성이랑 강호동이랑 싸우면 정찬성이 이길 것 같아.”


오늘도 이 간사한 혓바닥의 싸움은 끝이 날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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