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에 절여진 잼이 되고 싶지 않아서....
덜어냄의 미학. 최근 들어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덜어냄으로써 완성이 된다는 것에 대한 이론에 집중이 많이 되는 것 같다.
“이전에는 이런저런 맛을 많이 집어넣는 데에 집중을 많이 했다면 이제는 그 맛을 덜어내는 데 더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최근에 지나가다가 한 유튜브 채널에서 안성재 셰프님이 한 말을 들었다. 덜어냄의 미학이라. 사실, 글에서도 영화에서도 그림에서도 사업에서도 이 덜어냄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영역인 것 같다. 나만의 특장점, 나만의 색을 찾게 되는 요즘 시대에 특히나 그 덜어냄이라는 것은 뭔가 조금 더 어려운 것 같다.
“120번님 만의 특장점을 얘기해 주세요.”
“저는 해외연수를 오래 했기에 외국어에도 능통할 뿐 아니라 처음 접하는 세상에서도 누군가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데 있어 강점이 있습니다. 또한, 학점을 관리하면서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스펙을 쌓는 방법을 연구하며 교내에 동아리를 만들어 보다 진취적인 방향으로...”
나의 강점을 말하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스토리텔링이 들어가고 스토리텔링에 뒷받침이 될만한 근거와 결과들이 필요한 것 같다. 단순히 학점이 좋았던 학생에서 보다 많은 스펙들을 요구하는 시대가 지났고, 그 스펙을 넘어서 한때는 창업과정을 통해 사회시스템에 대해 얼마나 더 많은 경험을 했는지를 묻는 시대도 지나간 것 같다.
“우리가 왜 당신을 뽑아야 합니까?”
“뭐... 기름칠 잘 된 짱짱한 톱니바퀴가 하나 필요하신 것 아닌가요?”
사실, 어느 조직에 가던지 아마 사람을 뽑는 가장 큰 이유는 현재의 인력으로는 감당되지 않는 업무와 조직을 떠나간 사람들의 대체재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성장하기 위해서. 새로운 세상에 함께 발맞추기 위해서. 뛰어난 인재들과 보다 나은 성과와 목표를 공유하고 싶어서. 모두 맞는 말임에도 가장 큰 본질이 하나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우리도 도태될 것 같아서...”
근 몇 년 동안 취업시장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한 때 잠깐 붐을 일으켰던 IT시장과 개발씬을 제외하고 나서는 수많은 일자리들은 다시 불황의 자리로 돌아왔다.
“우리도 이제 거의 끝물이야.”
“슬슬 이직 준비해야 하는데 시장이 좋지 않아서.”
시대가 원하는 일의 직종들이 있었다. 물론 전문직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없어서는 안 되며 사회에서 어느 정도 보장받는 자리들이 분명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전처럼 과거에 급제한 것 같은 느낌은 많이 사라진 것 같다. 그 옛날에도 과거에 급제했다고 해서 고생길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세상이 힘들다고 하는 건 그만큼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들 입에서나 나오는 말이고. 아직 세상은 살만해.”
성공한 누군가가 저렇게 말을 한다고 하면 사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틀린 말은 아니지. 성공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처절하게 살아오면서 결과로 증명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말이 분명히 맞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차갑지만 그 말은 맞다. 그럼에도 최근에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길바닥에 나앉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IMF가 이랬을까?”
“그때는 지금보다 심했겠지.”
내 인생에서 꽤나 큰 파도가 친적이 있었다. 이제 거의 2년이 되어가는데 당시에는 그걸 사고라고 생각했다. 온몸을 찢어내는 듯한 거친 파도에 몇 개월을 그냥 자연재해를 만났다 생각하며 낭비했고, 몇 개월을 새로운 파도를 찾기 위해 방황했다. 눈앞에 당장 쳐해 진 파도만을 보며 살아갔다.
[ 영화 '관상' ]
“난 사람의 얼굴을 보았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요.”
영화 ‘관상’에서 송강호 배우님이 연기한 천재 관상가 ‘재경’이 아들을 잃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 한명회에게 했던 이야기이다. 파도가 아닌 바람을 봤어야 했다. 살다 보면 우리 삶 곳곳에 우리에게 주는 삶의 지혜와 행복의 힌트들이 많았음에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가 많은 것 같다. 영화에서, 책에서, 역사에서 수많은 교훈을 되새김질해주지만 우리는 그 되새김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씹어 삼키기 힘들다는 이유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이유로.
“성실해라.”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 있어서 두려움을 가지지 말아라. 누구나 처음인 시절이 있다.”
“우리가 아는 수많은 천재들은 자신의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수천번 그림을 그리고, 수천번 한 동작을 연습하다. 천재도 아닌 네가 왜 그런 노력도 없이 천재들만 살기 좋다는 망언으로 세상의 질서를 더럽히냐?”
아주 짧지만 닳고 닳도록 들었던 그 이야기부터 길게 늘여 놓은 만큼 더 오랫동안 아픔으로 다가오는 말들까지. 이미 정답은 눈앞에 있음에도 쉽사리 실천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마 우리의 잘못이 아닌가 싶다.
“요즘 다 힘들지. 누가 쉬워.”
“그냥 좀 편안하게 해. 그렇게 용쓴다고 해서 바뀌는 거 많지 않아. 좋게 생각해.”
달고 삼키기 좋은 말들에 한동안 꽤나 절여져 있었던 것 같다. 나 스스로의 색과 맛을 아예 변질시키는 설탕에 절여져 공장에서 찍어내듯 생산되는 잼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고하고 말이다. 덜어내야 할 것은 선택과 집중이 아니라 나태함과 과거에 대한 미련, 새로운 시작에 대하 두려움과 망설임인데 말이다.
“오빠. 이게 뭐야?”
“아.... 그게....”
“아니 어떻게 아직도 전여친 사진을 가지고 있을 수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너무 예의 없는 거 아니야?”
새로운 사랑을 할 때는 분명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위해 지나간 사랑을 정리하는 것이 예의인 것 같다. 그래야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으니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더라면 과거에 대한 미련도 지우는 게 그 용기에 정확한 마침표를 찍는 거겠지.
“일어났어?”
“어.”
아침에 일어나서 보내는 한 통의 카톡.
“나 인제 잔다. 잘 자.”
“엉. 잘 자. 내일 봐.”
잠들기 전에 보내는 한 통의 카톡. 성실함이라고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려주는 것 또한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사실 서로에게 나태해진 거겠지. 한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도 이런 노력들이 병행되어야 하는데 나라는 인간 자체를 바꾸고, 내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일에는 막상 그런 노력들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나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일인데 말이다. 이미 봄이 지나갔다. 조금 늦은 것 같지만 그럼에도 내가 덜어내야 하는 것은, 내가 버려야 하는 것은 아마 나 자신에 대한 불신이 아닌가 싶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시간을 만나기 위해 이제는 꽤나 많은 것을 덜어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나태함, 과거에 대한 미련, 두려움과 망설임 등등. 그런데 걘 잘 지내려나? 크흠... 정신 차리려면 멀었나? 크흠... 이래서 과거 교인들이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낸 건가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