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의 반란

1-2

by 심색필 SSF

「잘 지내?」

「어. 한국은 어때?」

「뭐. 그럭저럭 괜찮지.」

「오랜만이네.」

「그러게.」

「무슨 일로 연락했어?”」

「아... 다른 게 아니라...」


정말 오랜만에 연락했다. 시카고 대학에서 함께 2년 동안 고고학 연구를 했던 조안나. 미국을 떠나고 처음 한 연락이었다.


하얀색 연구실 가운을 입고 있는 20.png


「흠... 알다시피 그건 우리도 찾기 힘들어. 악숨왕국은 문헌도 거의 없고 자체 언어를 사용해서 해석도 힘들고. 그런데 한구게서 그런 걸 연구하는 단체가 있어?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학교 과제.」

「학교과제라고? 확실히 한국이 교육 수준이 대단하기는 하네. 박사들이 붙어서 해도 풀리지 않는 내용을 과제로 주다니. 진짜 대단하다.」

「그런 건 아니고. 조금 그런 사연이 있어서.」

「그런데 갑자기 왜? 설마 다시 돌아올 생각이 있는 거야? 안 그래도 박사님이 광민 얘기 매일 꺼내긴 하셔. 내가 한 번 박사님께 말해볼게.」

「아니야. 그런 거.」


사실 조안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본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지나간 추억 때문에 그리움에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봤다. 혹시나 하는 희망과 함께.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건 역시나 박사의 이야기였다.


“하긴... 이미 끝나 관계에 무슨 미련이 더 있다고...”


눈알을 3분의 1쯤 작아지게 하는 큰 안경에 너저분한 머리. 며칠 동안 씻지도 않은 모습에 매일 같은 티셔츠와 다른 문화권임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진성 너드의 삶 그 자체를 살아가는 종족들이 우리 건물에 깔려 있었다.


“좋은 아침. 리.”

“어. 좋은 아침이야.”


언제라도 몸에서 곰팡이가 필 것 같은 그런 랩실에 유일하게 빛을 내고 있는 존재가 조안나였다. 새하얀 피부에 오밀조밀하지만 자기주장이 뚜렷한 이목구비. 5대 5로 갈라진 비단결 같은 오렌지색 머릿결에 새까만 눈동자. 재미없는 전공에 재미없는 랩실에서 가장 재미있는 존재였던 그녀였다.


캐쥬얼한 옷을 입고 학교 캠퍼스에서 .png


「 와. 진짜 존나 이쁘다. 무슨 디즈니 실사화 같네. 」

「 실제로 보면 더 이뻐. 」

「 오. 드디어 내 주변에도 국제결혼 하는 사람이 하나 생기는 건가? 」

「 국제결혼은 무슨. 」

「 나도 미국 가고 싶다. 진짜 개 부럽네. 」

「 한국이랑 똑같아. 어딜 가나 이쁜 애들 있는 것처럼 대부분 평범해. 그렇게 이쁜 애들 많이 없어. 」

「 근데 너 따위가 어떻게 그런 엘프녀를 옆에 두고 있냐? 」

「 난 잘 생겼잖아. 」

「 지랄. 한국에서 너 새끼한테 먼저 말 거는 여자 한 번을 못 봤는데. 」


영수의 말 중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한국에서는 여자와 일도 관련이 없던 내 삶이었다. 모솔은 아니었지만 100일도 못 채워본 그런 거지 같은 연애로만 가득 채운 대학생활. 그래서인지 조안나와의 시간들은 내게 있어 꽤나 격정적인 시간들이었다.


“연구실에서 이래도 돼?”

“뭐 어때? 어차피 다 퇴근해서 아무도 못 와.”


폭설로 학교에 갇히게 된 날 우리는 연구실에서 결국 선을 넘어버렸다. 서적들과 문헌들이 가득 쌓여있었지만 조안나의 하얗고 탐스러운 몸에 이끌려 고대 유적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왜? 더 스릴 있지 않아?”

“재밌긴 하네.”


조안나는 나보다 더 도발적이었고 오히려 이런 상황을 더 즐기는 듯 보였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랩실에서 서로의 몸을 탐하고 있던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


“누구지?”

“경비원 아니야?”

“일단 숨자. 박사님일 수도 있잖아.”


우리는 거의 다 헐벗은 상태로 옷가지만 급하게 주섬주섬 챙긴 채 연구실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박사님이 들어왔다. 무언가를 놓고 온 듯 책사에서 서류를 챙기던 그는 랩실에서 느낄 수 없는 이상야릇한 온기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듯 보였다. 우리가 깔고 앉았던 서적들과 문헌들에 손을 가져간 박사는 서서히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아... 그게...”

“니콜라스 박사님?”

“아... 네. 맞아요.”

“뭘 놓고 오셨나 보네요?”

“네. 서류를 놓고 와서요. 나이가 먹었나? 컨퍼런스를 가는데 가장 중요한 걸 놓고 가다니.”

“지금 밖에 폭설인데 빨리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곧 차량도 못 다닐 것 같은데.”

“빨리 움직여야죠.”


덩치 크고 수염이 그득그득했던 경비원 덕분에 우리는 다행히 그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다. 콘퍼런스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폭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마 헐벗은 채로 그 자리에서 민망하디 민망한 모습으로 검거되었을 것이다.


“그럼 좀 잘해보지. 인마. 이쁘기도 엄청 이쁘구먼.”

“좋다고 다 이뤄지면 그게 사랑이냐?”

“아주 사랑 좀 나누시더니 거의 시인 다 되셨네?”


나도 그러고 싶었다. 계속 랩실에서 연구하면서 시민권도 받고 조안나랑 가정도 꾸리고. 평생 꿈꾸지 못할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꿈이란 게 원래 일어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듯이 쉽사리 원하는 대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 그래. 그래도 들어줘서 고마워. 」

「 거의 해준 것도 없는데. 유출되면 안 되는 자료가 대다수로 못 보내줘서 미안해. 」

「 아무튼 잘 지내고. 」

「 리. 종종 연락해. 우리 친구로는 남을 수 있잖아. 」

「 그래. 알았어. 종종 연락할게. 」

「 계속 연락해. 」


그럼에도 1년 만에 그녀에게 연락을 했던 것은 내게 있어서 꽤나 큰 용기였다. 얻어내고자 하는 것도 거의 얻어내지 못했고 오히려 그때에 대한 기억 때문에 아물지 않은 가려운 상처를 더 긁어낸 느낌이었다.


“진짜 좆같네.”

“뭐. 그래도 F는 안 주시겠지. 출석도 다 했는데. 설마 진짜로 졸업까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시진 않겠지.”

“하아... 진짜 욕 나오네.”

“야. 오늘 술 한잔 하자. 내가 살게.”

“하아... 오늘 술 마시면 취할 것 같은데.”

“취해. 내가 오늘 제대로 살게.”

“네가 왜?”

“아니. 너 고생하는데 하나도 못 도와준 것도 있고. 덕분에 나도 취업한 것 같아서.”

“취업?”

“어. 저번에 말 한데 붙었어.”


진짜 기분이 더러웠다.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내게 떨어진 건 하나 없는데 나 몰라라 하고 지 밥그릇을 챙긴 이놈은 취업했다고 위로주랑 축하주를 산다고 하는 이 꼴이 너무 짜증 났다.


“야. 너 아니었으면 나 이번에 또 떨어질 뻔했어. 사업한다 해외연수 간다 하면서 날려먹은 시간이 진짜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그래도 네덕에 딱 집중해서 취업만 준비했더니 되긴 되더라.”

“하아... 시발. 비싼 술 사라.”

“당연하지. 가서 그 악마 같은 썅년한테 들은 거 다 날려버리자고.”


“하아... 진짜 욕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네.”


-쾅!-


Firefly_Draw a picture of a Korean college girl in her early 20s with long black hair and tan 810368.jpg


내가 쏟은 시간에 대한 허무함과 영수에게 느낀 배신감을 개념 없는 신입생인 유정이에게 몰아 토로하던 그때 강의실 문이 쾅하고 열리며 욕설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아... 유정아. 그게 아니라...”

“잠깐만. 너 왜...”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언제든지 잔뜩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 유정이는 거친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에 꿀밤을 먹여 부라리는 눈을 내리고 싶었지만 뭔가 유정이의 모습이 이상했다. 여기저기 튀어 오른 푸른색 핏줄과 코와 귀에서 흘러내리는 가느다란 핏줄기. 안부를 묻기에는 공포스럽고 기괴한 느낌마저 드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저 깊숙한 곳에서 생존본능이 꿈틀거렸다.


“뭐야? 왜... 왜 그래? 욕한 건 미안한데...”

“야... 우리 뒷문으로 나가자. 우리 갈게...”


-캬아아아악!-


A surreal illustrati.png


[ 카페인의 반란 ] -> 웹소설 링크

https://www.blice.co.kr/web/detail.kt?novelId=100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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