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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어때요?

by 오창균

스무 살에 나를 낳고 어려운 형편에 맞벌이를 해야 했던 부모님은 내가 세 살이 되던 해 전라남도 곡성군의 한 시골마을의 친할머니집에 나를 맡겼다. 계란을 유독 좋아해서 매번 밥 먹을 때마다 계란 없으면 마당에 나가 계란장수 왔다고 계란 사달라고 흙마당에 데굴데굴 구르며 떼쓰던 나를 할머니는 항상 안아주고받아 주셨다. 할아버지가 태워주던 지게 타고 칡을 간식 삼아 해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며 놀았다. 몸이 편찮으셨던 할아버지는 어느 날 문득 돌아가셨고, 할머니와 나 둘이 가족이 되어 살았다. 엄마는 두세달에 한번씩 할머니집에 들렀고, 잠시 머물다 다시 가는 엄마 뒷모습 보며, 가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렇게 눈물범벅되도록 울다 아침에 일어나 멍하게 마당을 쳐다보곤 하던 기억 몇 번을 빼고는, 할머니와 함께 자고 음식 만들어 먹고 여기저기 함께 다니고 살았던 추억들, 논두렁과 개울에서 시골 친구들과 놀던 날들도 무엇보다 귀한 추억으로 남았으니, 그 시간들이 다행히 그리 서글프지만은 않은 보석 같은 기억이다.

일곱 살에 되던 해 유치원에 가기 위해 부모님이 있던 부산으로 다시 왔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대학에 입학하던 해 할머니는 갑작스레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이제는 되레 할머니가 부산집으로 오셔서 우리 가족의 보호를 받으며 함께 살게 됐다. 늘 건강하고 활기찬 할머니는 지팡이 없이는 걷지 못했고 나중에는 요양원으로 가셨다. 서른이 된 나는 일을 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경기도 남양주에 터를 잡으며 내 삶 살기에 바빴다. 부산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를 일 년에 많아야 두세 번 인사드리러 갔으니,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나도 그저 살아간다고 정신없이 바빴고, 할머니는 요양원에라도 계속 그렇게 계실 줄로만 알았다.


아버지에게 한통의 전화가 왔다.

'창균아 할머니 돌아가셨다..'

순간 아무 실감도 나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돌아가셨구나..

장례식장으로 갔다. 심지어 장례식장에 도착했는데도 이상하게 아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보고 있는 것도 그저 담담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3일장 마지막날 입관식을 한다고 모든 가족은 입관하는 장소로 모이라 했다. 할머니가 아무 말 없이 누워계셨다. 그제야 가슴이 시려오기 시작했다. 발끝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몸에 흐르는 듯했다. 계란 사달라고 데굴데굴 구르면 ‘그래 사러 가자’라고 옷에 묻은 먼지 털어주며 손잡고 계란장수 아저씨한테 데리고 가던 할머니, 늘 쌈짓돈 꺼내서 꼭 용돈 챙겨주시던 할머니,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그저 손주라는 이유로 손잡고 놓을 줄 모르셨던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그제야 슬픔으로 다가왔다. 정말 잘 안 우는 편인데.. 그때 정말 원 없이 한없이 울었다.


요양원에 계실 때라도 찾아뵈면 ‘어렸을 때 할머니랑 같이 살아서 행복했어요, 할머니가 키워주셔서 이렇게 손주 자식들도 낳고 이렇게 잘 컸어요’라고 한마디 못 해 드렸을까? ‘할머니 사랑해요’라는 그 흔하디 흔해서 누군가는 이런 말, 이런 글, 너무 뻔한 신파라고 할 만큼 뻔한 그 말 한마디 왜 못 해 드렸을까?

그때부터 사랑한다는 말, 고마운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되도록 자주 하고 그때 그때 하려 노력한다. 너무 과하거나 상황에 맞지 않게 남발하는 건 그 무엇도 좋지 않겠지만,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무엇보다 부모님께도 가끔 전화드려 꼭 말씀드린다. 물질에 마음이 있다고 했던가? 물론 용돈과 함께 드리면 그 사랑은 배가 된다는 농담 아닌 농담도 잘 참고 하면서 전하고 말한다. 지금 하지 않으면 지금 전하지 못하면 나중은 결국 슬픈 후회로 남기에,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 당시 붕괴 직전 빌딩에 있던 사람들의 통화와 메시지 대부분의 내용은 ‘사랑해요, 엄마’ ‘당신을 항상 사랑한다는 걸 잊지 말아요’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죽음 직전까지 다투고 미워하고 탓하며 티격태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아마 마지막의 순간에 엄마에게 아빠에게 형제자매에게 친구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해야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마웠던 것 좋았던 것을 전하고 싶을 것이고, 사랑과 고마움을 말하고 싶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생각나는 그 사람에게 늦지 않게 말해주자. 품고만 있었던 그 우물쭈물했던 말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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