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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저는 이번에 넥스노트 IR 피칭을 맡게 된 기획팀장 유라선입니다."
라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왼쪽 끝에 앉은 심사위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희가 서비스하는 임장노트는 기존 부동산 검색 앱이 채우지 못하고 있던, '현장 임장 기록'에 주목했습니다. 아파트 매수자들은 여러 아파트 검색앱을 사용하고, 블로그, 문서 도구, 메모앱 등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임장 내용을 기록해 왔습니다. 이처럼 단절된 작업 흐름 때문에 비효율이 발생하고, 임장기록은 번거로운 일이 되어버립니다. 매수 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임장임에도, 임장 기록을 생략하게 되는 것이죠.
저희 앱은 사람들이 귀찮아하는 작업을 자동화하여, 보다 쉽게 임장 기록을 남길 수 있게 합니다. 나아가 끌어온 매물 정보와 쌓인 메모 내용을 연계해, 어떤 매물이 더 사용자에게 적합한지 추천하는 기능까지 제공합니다."
라선은 기본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피칭을 마쳤다. 이건 내부 회의 브리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위원들은 라선의 말에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발표력과 설득력 모두 부족했다. 마음을 낚아챌 강력한 갈고리가 없었다. 실망스러웠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남은 건 질의응답이었다.
"임장고고가 제공하는 기능, 기존 부동산앱 기업들이 만들면 더 잘 되지 않을까요. 따라 잡히는 건 금방일 것 같은데."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라선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럴수도 있지만, 여러 소스에서 가져오는, 풍부한 데이터를 저희보다, 쉽고 빠르게 제공하긴 어려울 겁니다. 아.. 그 특허도 있고요."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의심의 눈길을 던졌다.
"특허가 있다는 게, 앱을 사용할 매력이 있다는 뜻은 아니지 않나요?"
추가로 남자가 질문했다. 임장고고의 기능이 좋다는 것과 매력이 있다는 것이 다른 의미였다는 걸, 라선은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기능이 좋은 제품이 자연스럽게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라는 생각을 라선은 그동안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검토해 보아야 할 부분이겠지만, 여기서는 어떻게든 무마시켜야 한다.
"다른 앱에서 제공하지 못하는 사용 경험 자체가 매력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실무자의 희망사항처럼 들리네요. 실제로 시장 반응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라선은 혼나는 학생처럼 가만히 입 다물고 있었다.
이후 질문이 쏟아졌다. 거침없이 퍼붓는 위원의 평은 비난에 가까웠다.
"수요 자체가 작지 않나요."
"비즈니스 모델이 약한 것 같은데."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감이 안 잡히네요."
소규모 지진이 라선의 발바닥에서 일어났다.
지진 경보가 울렸지만,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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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땠어요?"
회의실에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초율이 물었다.
"미안해."
라선은 누구도 볼 면목이 없었다.
"괜찮아요. 아직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닌데. 제가 조금 더 어필해 볼게요."
말은 그렇게 해도, 초율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보통 언제쯤 나와?"
"오늘 저녁까지는 정리돼서, 나올 것 같아요. 문자로 알려줄게요 언니."
"고마워."
초율이 회사 바깥까지 배웅 나왔고, 라선은 납작 눌린 채로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 허니맨으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웨일의 상태는 심각하지 않다고 했다. 라선은 심각한 쪽은 라선이었다. 병원 위치를 물었고, 라선은 웨일에게로 갔다.
응급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긴 웨일은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허니맨은 그 옆에 서서 웨일을 보고 있었다. 도착한 라선을 데리고 허니맨이 병실 바깥 쉼터로 갔다. 웨일의 가족이 모두 외국에 있어 자신이 잠시 봐주고 있는 상황이라고, 허니맨이 설명했다.
"피칭은 잘했어요?"
라선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차마 망했다고 할 수 없었다.
"뭐 잘 되겠죠. 고생 많았어요."
허니맨는 비어 있는 위로를 건넸다.
웨일은 걱정 말고 사무실로 돌아가라고 허니맨이 말했고, 라선은 병원을 나와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은 웨일의 사고 소식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이거 병문안 가 봐야 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직장 동료의 병문안은 종종 민폐니까, 아예 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게 평소 라선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최고 상사의 사고니 꺼리는 것이 당연했다. 웨일의 성격도 문안 온 사람들을 반길 것 같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병문안은 오지 않아도 좋다는 단체 문자가 도착했다. 정확한 안내로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줄인다. 합리적이었다. 웨일은 본인 장례식에도 같은 문자를 보낼 것이다.
현재 낮은 앱 사용률을 타개할 방안을 마련해야 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위원들의 지적 사항을 복기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답하지 못한 질문을 적으면서, 그리고 아직도 떠오르지 않는 답을 고민하면서 시간을 쥐어짜 냈다. 앱의 매력은 무엇이고, 어떻게 고객을 유인해야 할까. 생각하면 할수록록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퇴근 시각이 되었지만, 라선은 일어날 수 없었다. 아직 초율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집에 가서 기다리나, 회사에서 기다리나, 속이 울렁거리는 건 마찬가지일 테다.
사람들이 모두 퇴근했고, 마지막으로 세안나가 나가면서 집에 안 가냐고 물었다. 라선은 '좀 쉬다 가려고요.'라고 답했다. 고생 많았어요. 무리 말고 들어가요.
고생 많았다.
라선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어떤 고생을 한 걸까. 사고 난 대표 대신 퀵을 타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 최악의 발표를 하고 나온 게 고생이라면, 고생이었다. 성과 없는 고생. 유익한 고생을 하고 싶었다. 회사가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몸을 휘감았다. 물이 차 오르는 배에 구멍을 하나 더 뚫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지우기 지우고 싶었다. 웹에서 저예산 마케팅 방법을 검색했다. 이미 시도해 본 것이 다시 보이고, 또 보였다. 눈을 감자, 피곤이 실처럼 흔들리는 게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잠시 졸다가, 메시지 진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초율의 문자였다.
-안타깝게 되었어요. 투자 건은 나중에 다시 얘기해 보자네요. 오늘 고생 많았어요. 남은 하루 잘 보내세요.
자리가 꺼지는 것 같았다. 힘없이 라선은 고맙다고 답장을 보냈다. PC를 종료하고 일어났을 때, 라선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식을 병상 중인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내일 알리는 게 나을까.
그런데 웨일이라면, 오늘 확인하고 싶지 않을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웨일은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라선은 웨일이 아니라, 허니맨에게 연락했다.
"다음에 다시 보자네요. 상황을 봐서, 웨일에게 전달해주세요."
-그럴 게요. 고생 많았어요.
고생 많았다. 또 고생 많았다.
라선은 어깨 위에 곰 두 마리가 올라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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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로 운영하는 도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갈 곳 없는 아이들의 부모가 너도나도 아이들을 등록시켰다.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30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생긴 이전 관장과는 다르게, 곱상한 얼굴의 관장은 다른 이유로도 이목을 끌었다. 태국계 한국인이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는 걸, 낯설게 보았다. 유창하게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것도 어색하게 느끼는 듯했다. 그러나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받아 주는 곳은 이곳 말곤 없었다.
머리를 단발로 자른 리코는 발차기로 시원하게 허공을 갈랐다. 시범을 본 아이들은 리코의 지도에 따라 동작을 따라 했다. 기합 소리가 도장을 울렸다. 다들 열심히 따라 하기 바빴다. 한 아이만 빼고.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세온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중학생처럼 보일 정도로 덩치가 컸다. 반항심이 심했고, 폭력적인 성향도 이따금 눈에 띄었다. 누군가 잡아주지 않으면, 금방에라도 엇나갈 것 같은 레일 위에 놓인 상태였다. 곧 도장에 나오지 않아도, 놀라울 게 없었다. 준비 운동을 마치고, 겨루기 훈련에 들어갔다. 세온은 무자비하게 상대 아이를 걷어찼다. 리코는 연습을 중지시켰다. 아이들은 떨리는 눈으로 세온을 쳐다봤다. 세온이 리코를 노려 보았다. 한 대 칠 기세였다.
"화가 나니?"
세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발로 차 봐."
리코는 미트를 내밀었다. 세온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미트를 차려 했다. 그러나 세온의 발이 닿기 직전 리코가 미트를 뒤로 뺐다. 약이 오른 세온은 더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때마다 리코는 미트를 조금씩만 움직여 헛발질만 하게 했다. 분을 참지 못한 세온은 리코를 향해 태클을 걸었다. 육중한 몸이 복부를 들이받았다. 리코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대신 다리는 살짝 쳐서 세온이 넘어지게 했다. 그러고는 얼굴 바로 옆에 다리를 내리찍었다. 바람이 세온의 뺨을 쓸었다.
"넌 네가 센 줄 알았지."
밝은 목소리로 리코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랑 같이 고생 좀 더 해보자."
세온은 혼자서 일어났다. 리코는 빈 손을 거두었다.
아이들은 조금 전 일어난 광경에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너희들도 같이 고생 좀 더 하면, 태클에 안 넘어질 수 있어."
빙긋 웃는 리코를, 아이들은 '이상한 사람이다.'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세온은 멋대로 먼저 도장을 나갔지만, 잡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리코는 차로 아이들을 모두 데려다주었다. 과업을 모두 마친 리코는 도장을 정리하고, 샤워했다. 여유롭다면, 여유로운 날이었다. 도장의 불을 끄고 나가려 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웨일이었다.
-나 돈 좀 꿔주라
웨일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말이었다.
-직원들 마지막으로 월급 주게.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은 그다음에 나왔다. 리코는 곧장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면회 제한 시간 20분 전이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허니맨이 나와서 보호자 출입증 목걸이를 주었다. 가서 일찍 재워라고. 허니맨이 당부했다. 알겠다고 약속하고, 리코는 병실로 올라갔다.
웨일은 침대 등받이를 완전히 올리고 앉아 있었다.
"누워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누워 있어도 아프고, 앉아 있어도 아파. 조금이라도 더 깨어 있고 싶어."
"교통사고 후유증은 늦게 나타난대."
"안 괜찮아. 투자 유치에 실패했어."
"몸을 물어본 거야."
"안 괜찮아"
웨일이 깁스한 팔은 흔들었다.
"돈이 필요해. 말 그대로, 진짜 파산 직전이야. 이미 끌어다 쓸 수 있는 대출은 다 썼어. 무리한 거 아는데, 그래도 노력은 했다고 위안 삼고 싶어서 다시 물어볼게. 돈 빌려주는 거. 어렵지?"
심각한 목소리로 웨일이 말했다.
리코는 턱을 괬다.
"얼마나 갈 것 같아."
"다음 달이면 끝이야."
"빨리 낫네."
리코는 몸 얘기를 했고, 웨일은 돈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빌려 줄 거야?"
"아니."
리코가 웨일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