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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빌려줘. 너한테 상환 능력이 있어 보이진 않아."
리코가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웨일이 망연한 눈빛으로 리코를 바라보았다.
"대신 네 지분 나한테 매각해."
"뭐?"
"빌려주나, 지분을 사나, 넥스노트가 망하면, 돈을 잃는 건 매한가지야. 너한테 돈을 빌려주고 싶지만, 손해 보기는 싫어. 그래서 결론은 지분을 사는 거지."
"얼마나 사려고?"
"8%에 12억."
8%에 12억이면 넥스노트의 가치를 150억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친구 기 세워주려고, 12억을 함부로 꺼내지 않는다. 리코는 누구보다도 계산에 확실한 사람이었다. 확신에 찬 눈빛, 웨일은 리코가 아직 한참이나 앞서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게 지금 부끄럽고, 자존심 상한가. 그래서 거부한다?
그건 불타고 있는 집 안에서 첫사랑 사진이 있는 졸업앨범을 부둥켜안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소중할 수는 있겠으나, 목숨을 바칠 정도의 가치는 아닌 것이다. 살기 위해서, 기꺼이 내려놓아야 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지분에서 8%를 빼고 나면, 54%였다. 한 번 더 투자를 받으면, 경영권을 행사하기에 빠듯한 지분율로 내려간다. 칼을 손으로 잡는 것 같았다. 잡아야 사는데, 잡으면 베인다.
"진심이야."
말을 않고, 가만히 있자, 리코가 말했다.
"줄게, 8%"
"좋아, 돈은 내일 바로 줄게. 오늘은 편안하게 자."
"머리를 부딪쳐서 그런지, 현실감이 안 드네."
"원래 현실이 제일 비현실적이야."
리코가 싱긋 웃었다. 순백의 미소였다..
면회 시간이 종료되었으니, 그만 나가달라고 간호사가 부탁했고, 리코는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갔다.
남은 목숨을 모두 잃고, 컨티뉴 화면에서 쓰러져 가고 있을 때
플레이어가 동전을 넣고 갔다.
플레이어 원, 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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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복을 입고 곡괭이를 든 캐릭터가 신나게 뛰어다니며 녹색 동굴을 탐험하고 있었다. 라선은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앞사람의 폰 화면을 보았다. 어디서 본 건가 했는데, 헬렌이 링크를 보냈던 게임이었다. 통통 거리는 움직임이 앙증맞았다. 동굴 끝으로 가, 광물을 꽂으니, 맵이 환하게 켜지면서 지도가 모두 밝혀졌다. 따뜻한 초록빛이 회전하면서 부서지는 효과는 아름다웠다. 빛이 잦아들고, '녹색 심장을 지킨 자' 배지를 획득했다는 문구가 떴다. 실제 굿즈로 나와도 팔릴 만큼 매력적인 디자인의 배지였다.
플레이어는 상태창을 열어 그동안 모은 배지를 둘러봤다.
'열심히도 했네.'
앞사람이 어깨를 흔들었고, 제 발 저린 라선이 헛기침을 하며 반대편을 보았다. 그곳에도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폰 화면이 있었다. 그리고 직사각형 창 속에서 갑옷을 입고 광선총을 쏘고 다니는 캐릭터가 보였다. 조금 전 앞에 있던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도 던젼을 탐험하고 있었다. 헬렌이 링크로 보내준 그 게임이었다. 라선은 폰을 꺼내 헬렌이 보낸 링크로 게임을 설치했다. 앱을 켜자, 캐릭터 생성 페이지에서, 초대를 받고 가입한 보상으로 '의리 충만 탐험가' 배지를 받았다. 머리스타일, 눈 모양, 피부색, 체형을 일일이 커스터마이징 하기 귀찮은 라선은 랜덤으로 캐릭터를 만들었다. 결과는 오리튜브를 낀 덩치 좋은 곰이었다. 나름 귀엽게 보였다. 다음은 본격적인 탐험이었다. 대륙의 지도가 있었고, 동굴은 물론 늪지대, 설산까지 다양한 종류의 탐험지가 표시되어 있었다. 튜브를 장착한 겸, 파도 사막을 첫 목적지로 정했다.
그리고, 내려야 할 곳에서 다섯 역을 지나고 나서, 정신을 차렸다.
투자 유치는 실패하고, 앱 마케팅 방안은 아이디어조차 나오지 않은, 심.각.한. 상황에서, 게임이라니.
길을 돌아, 제대로 된 역에서 내려 집으로 걸음을 옮기며 라선은 다시 집중했다. 신규 사용자를 늘릴 방법을. 지금 게임 같은 걸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벽돌에 머리에 대고, 온몸으로 미는 기분이었다. 집 문 앞에 도착했을 때, 폰에 진동이 울렸다. 문자가 왔나? 아니었다. 친구를 초대하면 랜덤으로 광물 하나를 준다는 '엘리세바'의 알림이었다.
광물,
광물,
광물, 라선은 광물을 받고 싶다는 충동이 아래에서 울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헬렌도 이걸 참지 못하고, 초대했구나. 고작 광물 하나를 얻으려고.
어?
초대를 했고, 초대를 당했다. 초대를 당한 사람이 초대 충동을 느꼈다. 초대한 사람, 초대받는 사람 모두 보상을 얻는다.
그리고 반복.
"그러니까. 임장고고에 광물이 필요하다고?"
세안나가 삐딱하게 앉았다.
"광물로 뭘 할 수 있는데요?"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던전도 밝히고, 맵 곳곳에 둬서 개인용 포털로 쓰기도 하죠. 속성에 따라 다 달라요. 모으는 재미가 쏠쏠하죠."
눈치 없이 헬렌이 설명했다.
"그건 '엘리세바'에서 이야기죠. '우리 앱'에서 뭘 할 수 있냐는 뜻이었어요."
"맞아요. 임장고고에서 광물은 다르게 표현되어야죠.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시스템이에요. 게임적인 요소를 넣어 사용자의 체류 시간을 늘리고, 자연스럽게 다른 사용자에게 추천하게 되는 체계를 구축하는 거죠."
"단 시간에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거의 게임 하나를 만드는 건데..."
고론이 우려했다.
동의했다. 라선도 게임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을 시도해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지난밤 새벽까지 엘리세바를 플레이, 그러니까 분석하고 나서 깨달았다.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니에요. 엘리세바도 지도를 기반으로 한 게임이에요. 임장고고도 마찬가지고. 던전마다 기록을 남기는 것도 유사해요. 잘 녹여내면, 승산이 있다고 봐요."
"지금 우리가 가진 자원을 거기에 모두 쏟아부어도, 될까 말까? 너무 리스크가 커. 라선도 어제 처음 게임해 본 거라면서요, 직접 게임 디자인을 해본 적도 없으니, 절대적인 스터디 시간이 필요해요. 게다가 게임 디자인을 혼자서 독학한다?"
세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어, 아는 전문가 한 분 계시지 않아요?"
헬렌이 세안나를 보았다.
"아버님이 엘리세바 원작 PC 게임 제작하셨잖아요."
헬렌의 말에 라선도 세안나를 바라보았다. 고론도 덩달아 세안나를 보았다.
'이거 왜 이래.'
표정으로 세안나가 말했고,
"한 번 모셔도 될까요?"
라선이 부탁했다.
"조언이 필요하잖아요. 우리."
간청했다.
"말씀은 드려 볼게요."
마지못해 세안나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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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세바의 IP는 더 이상 아버지의 것이 아니었다. 회사가 기울고 있던 시기라, 맥스노리만의 역량으로는 총력을 다해도 모자랐고, 여러 회사가 참여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게임 엔진과 같은 기술적 권리와 콘텐츠에 대한 권리도 여러 회사가 나눠가지게 되었고, 회사가 망하고 나서는 그나마 남아 있던 권리도 모두 거대 게임 기업에 이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모바일로 리부트 된 엘리세바도 그 권리를 가져간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것이었다. 자신의 손을 떠난 작품이, 자신 없이 새로 지어져 세상에 나온 것을 보는 기분이 어떠할지, 세안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새로 앱을 냈는데, 반응이 시들시들해요."
모둠 초밥 세트를 사 들고, 아버지를 찾아온 세안나가 꺼낸 첫마디였다.
"임장 기록하는 앱이라고 했지? 유용할 것 같은데...홍보가 부족한 게 아니니?"
"완성도가 부족해서일 수도 있죠."
"그렇진 않을 거야. 네가 만든 앱이 그럴 순 없지."
"오냐오냐 해주면 버릇 나빠져요."
"사실 써봤어. 군더더기 없고, 편하더라."
앱을 사용해 봤다는 아버지의 말에 세안나는 조금 쑥스러웠다. 엘리세바 얘기를 하면, 아버지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까.
"감사해요. 좋게 봐줘서. 그런데 말씀대로 사람들을 유인하는 요소가 부족한 것 같아요. 사람들을 사로잡을 만한 '뭔가'가 필요해요. 이를 테면 엘리세바의 광물 같은 거요."
엘리세바라는 말에 아버지가 흠칫 놀랐다.
"게임적인 요소를 임장고고에 넣어보는 건 어떨까 얘기하고 있어요."
"게이미피케이션이구나, 도전적이네."
"지나치게 도전적이죠. 저희 쪽에 게임을 잘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한 번 회사 오셔서 얘기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엘리세바 레벨 디자인을 자세히 알고 싶어 해요."
아버지는 고민했다.
"PC게임과 모바일 게임은 달라, 게이미피케이션은 또 다르고. 20년도 더 된 게임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구나."
자신감 없는 목소리였다.
"지금 엘리세바 모바일 버전 발매 1주 만에 게임 다운로드 순위 1위예요. 원작이 재미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성적이에요. 그 원작을 만든 사람은 적어도 지금 저희 회사 직원 누구보다 게임 요소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
속이 꽉 찬 말이었다.
"너한테서 이런 칭찬을 들을 줄은 몰랐네."
"칭찬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뒤늦게 세안나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한 번도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네 동료들 실망시키지 않게, 열심히 준비해 가마."
"그럼 일정을 맞춰볼게요.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남은 초밥 한 알을 아버지가 세안나에게 양보했다. 드시라고, 드시라고 했는데, 그걸 한사코, 한사코, 양보했다. 궁상스럽다고, 세안나가 경멸했던 모습이었다. 뭐라도 하나 네가 더 먹는 게 나아. 나는 먹으나 마나 똑같으니까. 세안나는 먹으나 마나 똑같은 걸로 실랑이하는 게 구질구질하게 느껴졌었다. 자신이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지 않았다면, 참기 힘든 장면일 테다. 돈은 다툼을 줄였다.
"동료가 인생 게임이래요. 초등학교 때 진짜 재밌게 했다고."
다 먹은 초밥을 정리하고 나서, 세안나가 말했다.
"가서 만나면 감사하다고 해야겠네."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버지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세안나는 엘리세바를 다운받았다. 원작 게임이 발매되기 전, 아버지는 집에서 세안나에게 게임을 플레이하게 했다. 일종의 베타테스트였다. 그때 가 보았던 여러 던전 중 세안나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얼어붙은 중력장이었다. 세안나는 첫 번째 탐험지로 얼어붙은 중력장을 선택했다. 새하얀 공간 속에 투명한 벽으로 된 육면체 구조가 시시각각 배치를 바꾸는, 난도가 높은 던전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세안나는 날카로운 고드름이 떨어지는 구간을 지나, 평범한 배경처럼 보이는 벽면을 밀었다. 그 뒤에는 푸른색 구멍이 있었고, 세안나는 망설이지 않고 구멍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엔 민머리에 눈을 감은 채로 얼음에 봉인된 소녀가 있었다. 얼음 아래에는 한 줄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순간은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준 사람이, 추억이 되어버렸을 때다.
-세안나-
아무리 IP의 주인이 바뀌어도, 맵 구석에 숨어 있는 히든 NPC의 이름은 바꾸지 못했다. 불의 돌을 내려놓자, 봉인이 풀렸고, '유언의 상속자' 배지를 얻었다. 세안나는 첫 번째 탐사 기록을 작성하고, 게임을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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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오전 9시 50분. 세안나의 아버지가 넥스노트 사무실을 찾아왔다.
오라고 해서 왔지만, 딸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뒤에서 누가 문을 대신 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