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37화

by 설다람




"오셨으면 전화를 하시지 오래 기다리셨어요?"


세안나가 문을 열고 아버지를 회의실 안으로 모셨다.



잠시 후 라선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세안나의 아버지, 신지울은 면도날 같은 세안나와 다르게 푸근한 인상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넥스노트 기획팀장 유라선입니다. 귀한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별말씀을요, 대표가 아닌지는 한참 되었습니다. 편하게 불러 주세요."


소탈하게 지울이 말했다.


"네, 선생님. 상황을 말씀드리자면, 이번에 저희가 앱에 게임적인 요소를 도입하려고 해요. 최근에 엘리세바를 해보았는데, 매력적인 부분이 많아 벤치마킹하면 좋겠다 싶어서요. 그런데 막상 분석하려고 보니, 비전문가인 저로서는 뭘 어떻게 봐야 하는지, 감도 안 잡히더라고요. 엘리세바를 기획하고, 어떻게 재미를 만들어 내셨는지 들려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엘리세바의 중점이 되는 원리는 두 가지입니다. 수집과 상호작용이죠. 수집은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게임 속에 오브젝트로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캐릭터가 취득하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한 이벤트를 달성했을 때 수여되는 배지를 모으는 행위입니다. 상호작용은 이 행위하면서 플레이어와 오브젝트, NPC, 심지어는 던전 그 자체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호작용은 커뮤니티를 만났을 때, 극대화됩니다.


커뮤니티에서 플레이어들은 수집한 정보를 공유하죠. 그건 배지를 훈장처럼 자랑하는 것이나, 새로운 던전의 특성을 전파하는 일, 광물을 사고파는 일 모두를 포함합니다. 개인적인 만족감이 외부로까지 확장되는 것이죠. 이 바퀴를 축으로 게임은 돌아갑니다."


"플레이어 개인의 성취와 보상으로 끝나선 안 된다는 뜻이네요."


"그렇습니다. 그건 시작점이죠."


"친구 초대는 개인의 성취와 보상은 물론 다른 플레이어 간의 상호작용을 한 번에 이끌어 내는 장치군요. 단순히 유입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링크를 공유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확실한 즐길거리가 필요하고, 즐길거리는 앱의 기능과 밀접해야 한다.


"맞아요. 그리고 한 가지 또 중요한 게 있어요."


"과금 유도인가요?"


"아뇨. 스토리예요. 엘리세바는 의미 없이 던전을 탐험하는 게임이 아닙니다. 시공간이 뒤틀려 무너진 우주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지도를 밝힌다는 목적이 있죠. 각각의 플레이어들은 새로운 던전을 정복하고, 정화시키면서 세계를 복구시키는 집단의 목표에 기여합니다. 그건 지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자신이 이룬 업적이 즉각적으로 세상에 반영되는 걸 볼 수 있게 한 겁니다. 플레이어들은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조력자인 셈입니다. 이런 스토리가 사람들을 더 몰입하게 만드는 거예요."


지울은 엘리세바를 플레이하면서, 라선이 자신도 모르게 즐기고 있던 요소를 하나하나 분석해 주었다. 게임을 제작한 사람이 직접 설계도를 설명해 주니, 이해도 쉬웠다. 게임 디자인 컨셉 등 세부적인 요소와 관련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팅이 끝나고 라선은 세안나의 아버지에게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핵심적인 부분들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라선과 지울이 인사하고 있을 때, 헬렌이 다가왔다. 손에 뭔가를 들고서. 그건 녹색 우주복에 조선시대 투구를 쓰고, 손에는 레이저 화살을 든 피규어였다. 피규어를 본 지울은 놀랐다. 엘리세바 메인 NPC 중 하나인 '순신'이었다. 엘리세바가 흥행하긴 했어도, 피규어 제품을 낸 적은 없었다.


"오리지널 엘리세바 찐 팬입니다. 예전에 직접 만들었던 피규어인데. 혹시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 마효가 말씀했던 분이시군요. 어렸을 때 플레이해 보셨다고."


"마효?"


"마효, 세안나 본명이에요."


처음 듣는 이름에 헬렌이 정지되었을 때, 라선이 일러주었다.


"아, 네. 아마 저일 거예요."


"제 서명이 큰 의미가 있을까요."


헬렌이 준 펜을 어색하게 잡고, 지울이 물었다.


"제 유년을 지배했던 게임을 만들어 주신 분인걸요."


사람 좋은 시원한 웃음을 헬렌이 지었고, 지울은 마지못해 순신의 등에 정자로 이름을 적었다.


'신지울'


정직한 글씨체였다.


헬렌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라선과 헬렌은 지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회사를 나갈 때 세안나가 배웅을 나왔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나야말로, 덕분에 네 회사 구경을 하고 가네. 다들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지울은 인자하게 웃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너도 남은 하루 잘 보내렴."


지울은 엘리베이터 문이 끝까지 닫히는 순간까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안나의 눈을 보았다. 자신을 똑 닮은 눈이었다.


세안나가 태어나고, 친구들에게 늘 자랑했던 눈이었다.


'내 눈이랑 똑같지. 신기하지 않냐.'


'그나마 괜찮은 곳 닮아서 다행이다.'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를 했고, 세안나를 품에 안고 웃었다.



'넌 나의 자랑이란다. 언제나, 어느 순간에도, 어떤 상황이라도.'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스토리와 성취 보상 체계 그리고 상호작용 여기에 앱 기능까지 녹여내야 한다. 매일 앱을 켜고 싶을 만큼 재밌어야 하지만, 게임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게이미피케이션을 공부한답시고, 엘리세바를 플레이했고 던전 세 개를 클리어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배지 목록에는 은색별의 수호자, 탁월한 사냥꾼, 오로라의 계약서 라는 배지 세 개가 새로 생겨났다. 목록 창을 닫고, 캐릭터 화면으로 돌아왔다. 오리튜브를 낀 덩치 좋은 곰은 이제 엘프 모자까지 썼다.


캐릭터도 넣어야 하나? 너무 뜬금없는데.


그럼 뜬금 있게 만들어야지.


라선은 자문했다.


스토리를 쓰라고.


써본 건 매뉴얼뿐인데, 스토리가 써질까?


그럼 앱에 집중해. 임장고고의 궁극적인 사용 목적은 집을 구하는 거야. 그걸 네가 혼자서 할 수 있겠어? 그럴 리가!


이거 누구 말투 같은데?


딴생각하지 말고 다시 집중해


라선은 다그치는 자신의 말을 들었다.


자, 임장고고는 내 집을 마련하는 길을 안내하는 기록 지침이자, 일지가 되어야 해. 미래를 가리키면서, 과거를 적는 것. 이 과정을 지나가는 길을 함께 걸어주는 거야. 마치 수호천사처럼. 집은 구하는 걸 도와주는 수호천사라.


머릿속으로 아이디어를 조각하고, 굴리고, 던지다, 휴대폰을 보았다. 임장고고 앱 아이콘이 씰룩거렸다. 먼지가 묻었나 싶어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대었을때. 갑자기 아이콘에 고양이 귀가 튀어나왔다. 디자인 규격 상 이미지가 네모칸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애초에 귀가 달린 아이콘을 제작한 적도 없었다. 라선은 아이콘을 눌렀다.


앱이 켜지면서 물음표 박스가 화면 정중앙에 나타났다.


-부동산 시장은 위험하단다. 이 녀석을 데리고 가렴


라선은 박스를 터치했다. 그러자 박스가 한 바퀴 돌더니 동글동글하게 생긴 검은 오리가 나왔다.


-집 구하는 걸 도와줄게!


해맑은 얼굴로 오리가 텍스트로 외쳤다. 잠시 후 오리의 형체가 흐물거리더니, 삼색 고양이로 변했다. 고양이는 화면을 둘러보더니, 화면 바깥으로 사라졌다. 화면은 원래 인터페이스로 돌아가 있었다.


집으로 안내해 주는 존재, 라선은 고양이를 따라 타아와의 집으로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굽이굽이, 우당탕탕, 우여곡절, 끝에 나타난 집.


그리고, 이상한 천사


제법 그럴싸한데?


라선은 조금 전에 본 앱 화면과 캐릭터를 스케치하고는 고론에게 달려갔다.





"고양이랑, 천사?"


"네, 고양이랑, 천사."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고론?"


"왜요. 프레시. 귀엽잖아요. 그리고 고양이만 있는 거 아니에요. 개구리도 있고. 오리도 있어요. 곰이랑, 아메바도 있죠. 아 참 네모 로봇도요."


"아메바는 누가 넣은 거야."


"세안나가요."


"로봇은"


"헬렌이요."


프레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 아메바 천사랑 로봇 천사가 사람들 끌어올 수 있다고 믿어? 사장 없다고, 라선 막 나가는 거 아냐. 이러다 우리 망해."


"웨일이 전권을 맡겨대요."


"캐릭터 하나 넣는다고, 유저가 늘어나면, 다른 앱도 다 캐릭터 넣었지. 이건 그냥 시간 낭비, 돈 낭비야. 대체 누가 걔 기획팀장 자리에 앉힌 거야!"


"그냥 캐릭터 하나 넣은 게 아니에요. 시스템 자체를 재구조화하고 있어요. 아무도 방문하지 않은 곳에 자주 기록을 남기면 '개척자' 배지를 준다든지, 기록을 작성할 때마다 중개수수료를 깍을 수 있는 포인트도 주고요."


고론의 눈은 똘망똘망했다.


프레시는 퀵펜슬이 임장 노트 앱을 서비스하게 된 것도, 노트 앱에 게임의 탈을 씌우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망하진 않겠지?





'저와 함께 최고의 매물을 찾아봐요!'


라선은 문구를 재확인했다.


랜덤으로 배정받은 캐릭터가 인사를 건넸다. 고론의 캐릭터 디자인 감각은 뛰어났다. 개구리와 아메바도 호불호가 없을 정도로 무해했다. 이모티콘 스튜디오 급이었다. 캐릭터는 훌륭하니, 잘못된 단어 선택으로 사람들에게 뭇매 맞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안내는 하되, 거만하지 않아야 한다. 독려는 하되 성가시진 않아야 한다. 애써 만든 캐릭터에 미운털이 박히면, 털뿐만 아니라 캐릭터 요소 자체를 뽑아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이번에 올리지 않으면 그땐 정말 끝인지 몰랐다. 웨일은 이번에 겨우 숨통이 트인 것이라고 했다. 허니맨으로부터 웨일이 대출까지 끌어와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프로젝트가 실패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수히 많았다. 리코가 한 번 더 투자한 금액도 수익을 내지 못하면 고갈되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엔젤윙즈의 발표를 망친 것을 반드시 만회해야 한다. 아직 웨일은 퇴원하지 못했다. 본인은 가볍다고 해도, 검사 결과는 가볍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 DRI는 자신이었다. 최종 의사 결정을 내리다는 건, 모든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리코와 웨일은 이 중압감을 느끼며, 하루하루 걸어 나갔을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과 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다. 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내려야 할 결정을 자신이 하는 게 맞는지 거듭 되묻게 되었다. 이미 준비가 끝나, 되돌릴 수 없는 지금에도.



어느 나라에 그런 속담이 있어


천국에 닿을 때까지, 날개를 접지 마라.


어느 나라에요?


하늘 나라.



웃기지도 않았던 농담이었다. 그 농담 위에 올라탔다. 꽉 잡아.



*DRI: Directly Responsible Individ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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