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富럽지 않게, 나 富끄럽지 않게 39화

by 설다람

|관심 매물|

|<오리엔탈펠리체드래곤힐> 최저가 매물 시세 변동 24억|

24억...

라선은 임장고고에서 자산을 확인했다.

예금자보호 한도 금액에 맞춰 저축은행 두 곳에 각각 넣어둔 예금 4,900만 원과 파킹통장에 있는 1,880만 원,

합쳐서 총 1억 1680만 원이 있었다.

최저가 매물을 사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다.

DSR에 맞춰 주택담보대출 최대로 받는다고 해도

18억 넘게 필요했다.

임장고고에서 매수 가능 확인 기능을 통해 얻는 결과값도 같았다. 매수 불가. 앱에서는 신용 대출도 모두 끌어모은 극단적인 시나리오로도 알려주기에, 임장고고에서 매수 불가라고 판정된 것은 부모님 도움이나, 사채가 아닌 이상 절대로 매수할 수 없는 매물이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넥스노트의 지분을 매각하는 것이었다. 라선이 보유하고 있는 넥스노트의 지분은 6%였다. 6%의 지분이 18억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넥스노트의 기업 가치가 300억이 넘어야 한다. 리코가 마지막으로 투자했을 때 넥스노트의 가치는 150억이었다. 리코가 즉흥적으로 기업 가치를 평가했을 리 없다. 고 투자자들은 짐작했을 것이다. 라선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리코의 결정은 근거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웨일도 그렇게 라선에게 전해주었다. 고마워하되, 기대지는 마라고.

리코가 투자했다는 소식 이후에 넥스노트가 보여준 행보는 괄목할 만했다. 현재 임장고고의 MAU는 250만이었다. 부동산 앱 3대장인 백방, 아필, 부자고고와 비등한 수치였다. 성장력을 증명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도 내 집 마련은 기약 없는 바람이었다.

땅을 발바닥으로 차고, 발목을 풀었다. 막연함이 산뜻하게 느껴졌다. 답답함이 온몸을 주물렀다.

해결되는 것 없었기에, 해소라도 해야 했다.

뜀박질이 다시 시작되었다.

"지금 기슭으로 떨어지면, 살아남은 사람이 포럼에 가서 발표하는 거예요. 알겠죠?"

커브를 따라 핸들을 꺾으며 웨일이 말했다. 라선과 웨일은 글로벌 프롭테크 포럼 참가를 위해 그랜드 프리지언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산중턱에 있는 호텔로 가는 길엔 커브가 유난했다.

웨일의 말은 농담인 듯하면서도, 농담이 아닌 듯했다.

"119엔 전화하고 가주셔야 해요."

라선은 진심으로 답했다.

마지막 커브를 돌고 나자, 시야가 탁 트이면서 도시의 전경이 드러났다. 하늘 아래 그림을 펼친 듯했다. 라선은 창을 내려 바람을 맞아보고 싶었다. 웨일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곧 호텔 입구가 나왔고, 지하에 차를 대고 웨일과 라선은 콘퍼런스장으로 이동했다. 콘퍼런스장은 지상 1층에 있었다. 메인 프로그램 시작 30분 전인데도 복도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벽에는 포스터와 함께 프로그램표가 붙여져 있었다. 메인 프로그램 첫 번째 세션 주제는 '프롭테크는 어떻게 사회적 효익을 만드는가'였고, 발표자는 웨일이었다. 자신이 발표하는 것도 아닌데, 라선은 긴장감으로 손이 저릿저릿했다. 콘퍼런스장 안으로 들어가니, 더 떨렸다. 500명은 거뜬히 수용할 수 있는 홀은 지나치게 넓고, 층고도 높았다. 원형 테이블로 꽉 찬 홀은 말 그대로 연회장이었다. 차 사고 없이 웨일과 함께 몸 멀쩡히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라선은 맨앞 무대로 올라가 발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포럼 진행 요원이 다가와 웨일에게 발표에 대해 안내해 주고 VIP석으로 데리고 갔다. 라선은 두 테이블 뒤, 자리를 배정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가 꽉 찼고, 포럼이 시작되었다. 내빈 소개가 지루하게 이어졌고, 더 지루한 환영사와 축사가 조금 더 이어졌다. '애자일'에 익숙한 사람들의 인내심이 바닥나려 할 때, 마지막 내빈이 무대에서 내려왔다.

다음은 웨일의 차례였다. 차분하게 무대 위로 올라간 웨일은 마이크를 건네받고, 발표를 시작했다.

매물 탐색에서부터 대출 조회, 등기 이전, 취득세 납부 그리고 이후 재산세까지 부동산 매수 생애 주기 전반을 책임지는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임장고고의 성과와 목표가 발표의 핵심이었다.

목소리, 어조, 눈빛, 제스처, 호흡.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다. 칼날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여유로웠다. 날 때부터 다른 급으로 태어난 존재라고, 생각했다. 질투가 안 날 수 없었다.

"지켜보십시오. 프롭테크 미래의 지도를 밝혀 나갈 테니까요."

마지막 멘트가 끝나고, 박수 소리가 터졌다. 라선도 참여자석에서 박수를 보냈다. 주변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인상 깊게 들은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카피앱을 만들고, 잘도 미래 지도를 밝히겠다고 말하는군요. 한 대표"

VIP 석으로 돌아온 웨일에게 백방의 백제강이 빈정거렸다.

"지금의 부자고고를 카피한 건 아니죠. 저흰 미래의 부자고고를 당겨 왔을 뿐입니다. 그걸 백방이 할 수 있더라면 좋을 텐데 말이죠."

"상도덕이란 게 있어. 이 대표가 사주한 거라면, 그건 진짜 뒤통수치는 건데 말이지."

"그럴 리가요. 이 대표는 이제 투자자입니다. 경영은 제가 하고 있죠. 그리고 혁신에 상도덕이 어딨 나요."

"혁신이라고? 대체 무슨 혁신을."

"중개 시장도 완전히 전산화를 이뤄낼 겁니다. 부동산 계약서도 모두 전자로 열람할 수 있을 거고, 더 이상 집문서를 장롱 속에 넣어둘 필요도 없죠. 우리는 빠르고, 효율적입니다. 백방과 다르죠. 부동산을 매수하고 매도하는 전 과정을 앱 내에서 가능하게 될 겁니다. 발표에서 말했듯이요."

웨일이 간단히 정리했다.

"그럼 부자고고는 어떻게 하고, 당신들이 만든 거 아냐?"

"부자고고는 이제 대표님 것이죠. 건투를 빌겠습니다."

"젠체하지 마. 결국 M&A로 엑시트하고 튈 생각이잖아? IPO는 꿈도 못 꾸시겠지."

"무엇이든 간에 필요하면 하고, 없으면 하지 않습니다."

"당신 직원들이 들으면 퍽이나 좋아할 소리군."

"그러길 바라야죠."

웨일은 지지 않았다.

마지막 발표가 끝날 때까지, 웨일의 테이블에 긴장감이 넘쳤다.

라선은 백제강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웨일을 바라보았다. 척 봐도 불편한 자리였다. 백제강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 발표 세션이 끝나고, 백제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콘퍼런스장을 나갔다. 다른 테이블에서도 몇몇 사람들이 식사를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라선의 테이블에서도 2명이 일어났다. 반면 라선은 식비를 아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직원들이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식전 빵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때 5대 5 가르마를 탄 남자가 비어 있던 옆자리에 앉았다.

"유라선 팀장님이시죠. NK 부동산 부대표 이심찬입니다."

유한 인상의 심찬이 먼저 명함을 건네며 인사했다. 부대표라기엔 라선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네, 처음 인사드립니다. 넥스노트 기획팀장 유라선입니다."

라선도 명함을 주었다.

"이전부터 뵙고 싶었는데, 마침 자리가 잘 잡혔네요."

지나치게 친한 말투로 심찬이 말했다. 립서비스가 상당했다. 라선은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최대한 거리를 두려 했다.

"임장고고를 금융 플랫폼으로 전환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셨죠. 넥스테이트에서 부자고고로 리뉴얼을 맡으신 분도 유 팀장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마어마하시네요."

"넥스노트는 한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팀이 움직인 결과죠. 넥스노트라는 하나의 팀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심찬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NK 부동산 전무 자리를 제안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현재 NK 부동산은 늙었어요. 규모가 큰 만큼 느리죠. 조직에 변화가 필요해요. 트렌드에 민감하고, 기민하게 대응할 줄 아는 사람이 사업을 이끌어야 해요. 현재 내부 인력에서는 그런 인물을 찾기 어렵습니다.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좋은 리더를 못 만나서라고, 컨설팅 회사가 진단 내렸어요. 그리고 헤드헌터가 물색해서 찾은 사람이, 유 팀장입니다. 전전무직이 아무나 앉는 자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직접 왔습니다."

라선은 느닷없는 제안에 당황했다. 대기업 부대표라는 사람이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 테다. 그렇다면 지금 한 제안이 '진짜 스카웃 제의'라는 건데, 라선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내가 뭐라고?'

아무 말도 못하고, 라선이 멍하게 포크를 쥐고 있자, 심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곳에서 급작스럽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실제로 뵙고 말하고 싶었는데, 실례를 범한 것 같네요. 내일 중으로 인사팀에서 정식 제안 메일을 드릴 겁니다. 조건 협상은 언제든 열려 있으니, 편하게 연락 주세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심찬은 명함을 라선에게 주고 사라졌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정신이 부유하고 있을 때, 직원이 메인 요리로 스테이크를 내려놓았다. 비싼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꿈인가. 그렇게 이력서 넣고 또 넣어도 떨어진 NK였다. 비록 계열사지만, NK는 NK였다. 게다가 전무라니? 말도 안 되는 직위였다.

디저트로는 '크렘 브륄레'라는 음식이 나왔다. 상무라는 단어만큼이나 생경한 이름이었다.

달콤함으로 혀를 닦고 나서, 라선은 앞 테이블에 있는 웨일을 찾았다. 웨일 네 테이블도 식사를 끝내고 파하는 분위기였다. 라선과 눈이 마주친 웨일이 일어나 라선에게로 왔다. 둘은 짐을 챙겨, 홀을 빠져나왔다.

"태워줄까요?"

웨일이 라선에게 물었다.

"어, 그게 괜찮아요. 지하철로 갈게요."

"그럼 지하철역 앞에 내려드릴게요."

"어, 그게 역이 이 근처라, 걸어서 가도 될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내일 봬요."

웨일은 인사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슴이 내려앉지 않은 라선은 웨일이 떠나고 나서 한참 가만히 서 있었다. 현실감이 없었다. 라선은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지도앱을 켜 지하철역을 확인했다. 역은 걸어서 24분 거리에 있었다. '이 근처'에 있다는 느낌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라선은 홀린 사람처럼 산 아래로 걷기 시작했다.

호텔을 떠난 이심찬은 다른 호텔 파티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괜찮은 기업 자제들이 모이는 사교 클럽이었다.

"유라선 팀장님 만났어."

심찬이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사람들을 바라보는 검은 드레스 차림의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아, 심찬 오랜만! 포럼에서 만났구나! 그치 라선이 보기보다 강단이 있다니까. 어리바리해 보여도, 할 일은 어떻게든 해내더라구. 걔 덕분에 월급도 올랐다!"

고론은 폰으로 월급을 보여주었다.

"누나 고등학생 때 용돈보다 적은데."

"그때는 노력없이 얻은 돈, 이건 노력해서 얻은 돈! 가치가 다르지."

"맞아, 가치가 다르지. 노력 없이 얻은 돈이 훨씬 더 가치있지. 물론 용돈은 부모님 돈이라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주식 너무 어려워 현금 20억 가지고 있으면 노후는 해결되겠지?"

"누나는 그게 문제야. 왜 그렇게 생각을 가난하게 해. 굴리지 않으면, 20억도 결국 마르게 돼."

"넌 몰라 대학교 1학년 때 사기 당해서 1억을 잃어버리고 나면,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고! 트라우마야."

"그것도 나태한 거지. 잃은 만큼 배웠으니, 두 배로, 세 배로 되갚을 생각을 하는 게 본인에게 사과하는 거야."

"너처럼 못 해 난."

고론이 시무룩해졌다.

"그렇게 재산을 갉아 먹다가 바닥까지 가진 마."

심찬이 빈정대듯 말했다.

"그러진 않을 거야!"

고론이 호루라기처럼 삐 소리를 내며 부정했다. 심찬은 고론을 무시하고, 친구들이 있는 자리로 옮겼다.

차를 타고 송호 대교를 건너면서 웨일은 포럼에서 사람들과 나눴던 대화 내용을 복기했다. 백방 대표는 확실히 적대적이었다. 백제강이 넥스노트를 인수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다. 넥스노트의 가치가 더 오를 수록. 인수할 능력이 있는 기업 수는 줄어든다. 지금 팔아야 한다. 그러니 그전까지는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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