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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쉬고 있어'의 속뜻은

그래, 나 백수다 인마

by 삼십대 제철 일기

오랜만에 어느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일할 때 알고 지내던 분인데, 업무적으로 자주 볼 일이 있을 때 바짝 친해졌다가 볼 일이 끝나면서 서서히 잊힌 사이였다. 안부를 묻는 선배에게 몇 달 전 퇴사했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리고 이어진 그렇고 그런 대화는 다음과 같다.


-퇴사? 갑자기 왜?
-그냥 좀 쉬고 싶어서요.
-쉬면서 뭐 하게?
-놀랍게도 아무 계획 없어요.
-뭐?


이렇게 대화를 시작하고 나면 뒤따라오는 질문은 늘 똑같다. 그래서, 이다음 계획이 뭐냐고! 사람들은 나도 모르는 나의 계획을 줄기차게 물어봤다. 내가 가진 계획이라곤 '나만의 계획' 뿐이었다. 남들의 수긍을 얻기 힘든 계획.


이를테면 '몸과 마음의 건강 챙기기' 같은 거.


이야기는 자꾸만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성의껏 대답하려 했지만, 정말로 이 상황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게 없었다. 얼마나 쉴지, 다시 내가 했던 일로 돌아갈지, 아무것도 정해놓은 바가 없었으니. 그래서 찾은 답은


"잠깐 쉬는 거예요. 늦지 않게 일해야죠."


정도로 답했다. 선배가 꼬치꼬치 캐물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경력직을 채용하는데, 원하면 추천을 하고 싶다는 거였다. 돌아올 의사가 있으면 차라리 잘되었다며.


하지만 그것 또한 나의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쉬는 동안 일하면서 알고 지냈던 이들을 통해서 입사 제안을 꽤 받았다. 감사한 일이었지만 불안해서, 솔깃해서, 떠밀려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나는 적당히 설명하고 유쾌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마쳤다. 일터에서 만난 사이라고 해도, 서로 좋은 기억을 갖고 있다면 오랜만의 연락도 반갑고 즐거웠다. 전화를 끊고 나는 '나의 상태'에 대해 생각에 빠졌다.


그러니까 나는,

꽤 오래 하던 일을 관두고 회사를 나왔고

언제, 어떤 직장으로 돌아갈지는 정하지 못했지만

다시 일을 할 의지는 충분히 있기 때문에

'잠깐 쉬고 있다'라고 말하는 상태.

다시 말하면


완전한 백수 상태!


사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그냥 백수다. 일하지 않고, 돈 벌지 않는, 뚜렷한 계획 없는 백수!

그걸 잘 포장해서, 너무 노골적이거나 반감이 들지 않도록 말하다 보니 '잠깐 쉬고 있어요'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차피 다시 돈을 벌러 나가야 하니 '내내' 쉬고 있다고 말할 순 없는 거 아닌가. 더군다나 아예 재취업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가는, 지금처럼 때때로 오는 입사 제안도 끊길 수 있으니. (그럼 아쉽잖아!)


그래서 난 어김없이 안부 연락이 오면 똑같이 답한다.


"잠깐 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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