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아주는 데가……없다!
퇴사 후 잔고가 비어 가는 걸 볼 때마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긴축 모드에 들어갔지만, 아예 안 쓸 수가 있나. 퇴직금을 다 쓰기 전에는 다시 일터로 갈 생각이다. 그때를 '백수 마지노선'으로 잡았다.
그런데도 안심이 안 되었다. 한숨을 계속 쉬면 우울해진다. 그저 날숨일 뿐인데 그 안에 갖은 감정이 섞여 나와 내가 마시는 공기를 오염시킨다. 불안함을 들숨으로 마시고 나면, 한층 더 습하고 우울한 날숨으로 뱉는다.
그걸 계속하다 보니 번뜩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신경이 쓰인다면 돈을 벌면 되잖아?
당장 일터로 돌아갈 자신이 없다면 아르바이트나 단기 일자리라도 알아보면 되는 것을! 나는 그때부터 사람인, 잡코리아, 알바몬, 당근마켓 등등 여러 앱을 돌면서 일자리를 찾았다. 그러면서 반성했다. 내가 시시때때로 했던 그 말을.
"그냥 알바나 할까?"
퇴사를 고민하던 시기에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내가 하는 일은 야근과 회식, 출장이 잦았다. 잘하려다 보면 일과 내 생활의 경계가 금방 무너졌다. 그러다 보니 '워라밸'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워라밸이라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
이게 되려면 정시 퇴근을 하고, 집에서도 업무를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자유롭게 휴가를 쓸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렇게 살고 있는 직장인도,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회사도 꽤 있을 거다.
하지만 저기에 '원하는 연봉'까지 더해진다면? 워라밸을 지키면서 원하는 급여까지 받을 수 있을까. 그건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많이 일하거나, 뛰어난 전문성을 갖출수록 돈이 따라오니까.
나는 회사를 다닐 때, 연차가 오르고 연봉이 오르면서 그에 맞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자기 효능감의 문제였다. 그러다 보니 더 잘하기 위해서 스스로 무리를 한 적도 많았다.
잔뜩 지쳤을 때 든 생각은 '일과 삶의 균형'이 아니라 '일과 삶의 분리'였다. 완전히 떼어내서 두 명의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일하는 나, 일하지 않는 나.
아르바이트나 계약직으로 일하면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계약 기간만 일하면 되고, 인사평가나 승진이 없으니까. 정해진 시간에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더 이상 일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고.
아르바이트로 최소 생계비만 벌고, 그 외 일하지 않는 완벽한 나의 시간에는 자기 계발을 하거나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걸 꿈꾸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지금 하면 되잖아?!
나는 아르바이트를 찾을 때 나름대로 기준을 세웠다. 집에서 도보로 통근이 가능하며 하루 6시간 이내, 3개월 이내 단기 근무할 수 있는 곳으로! 하지만 이건 꽤 까다로운 기준이었다.
일단 단기 아르바이트가 많지 않았고, 단기로 구하는 곳은 풀타임을 원했다. 더군다나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는 선까지 그어버리니 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결국 지역을 넓혀서 알아보기 시작했고, 그러니 조금 할 만한 곳들을 찾았다.
그중 4곳을 추려 원서를 냈다. 나의 경력과도 연관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금방 연락이 올 줄 알고, 혼자 김칫국을 들이키며 그중 어디를 갈지 저울질을 했다. 아이 창피해.
그래서 결과는?!
그중에서 딱 한 곳에서만 연락이 왔다. 나머지는 아예 면접의 기회조차 받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지원자 평균 연령을 보니 20대 초반이었다. 그렇다. 이제 아르바이트에선 나이로 밀리는 것이었다!
하긴, 나도 마지막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20대 초반이었다. 관리자 입장에선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고용하는 게 여러모로 편할 테고, 어릴수록 체력도 좋고 행동도 빠를 테니 이왕이면 더 젊은 사람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너무 당연한 현실을 잠깐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래도 한 곳에서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러 갔다. 오랜만에 셔츠를 입고 구두를 신고 화장도 했다. 하지만 첫 질문에서부터 막혔다.
"얼마나 오래 일하실 수 있으세요? 저흰 최대한 오래 일할 분을 구해서요."
채용 공고에서 근무 시간과 근무 요일, 근무 기간 등은 모두 '협의'로 표기돼 있었다. 하지만 최소 1년 이상 근무하길 원한다고 했다. 거짓말할 수는 없었다. 결국 면접을 5분 만에 끝낸 채 나왔다.
그곳에서 제시한 근무 시간은 하루 3시간(오후 시간대)이었다. 하루 3시간짜리 파트타임을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생계는 유지될 수 있게 고용해야 하지 않나. 좀 씁쓸해졌다.
그러면서도 막상 면접에 떨어지니 아쉬웠다. 그 뒤로 비슷한 아르바이트 자리에 몇 번 더 지원서를 냈지만, 연락이 오는 곳이 없다. 이제 근무 조건을 조금 더 수정해서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여러모로 외면했던 현실을 마주하는 시기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엔 나이가 많고(물론 업종·직무에 따라 다르지만), 일터로 복귀하기엔 여전히 겁을 내고 있는데,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상태다.
흠. 어려운데?
일단 진단은 했는데 처음 겪는 상태라 스스로 어떤 처방을 내려야 할지는 모르겠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