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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잘딱깔센을 원한다고요?

내겐 너무 어려운 회식 장소 정하기

by 삼십대 제철 일기

회사를 다닐 때 질색팔색했던 일이 있었다. 바로 회식 장소 고르기. 상사의 마음에 드는 회식 장소를 고르는 건, 정말이지 지독하게도 어려웠다. 이런 얘길 하면 돌아오는 말들은 비슷하다.


-식당을 다양하게 골라서 그중에 선택하게 하면 되잖아.
-평소에 상사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파악해 놔.
-회식 메뉴 다 거기서 거기 아냐? 어렵게 생각하지 마.


나는 이 모든 걸 해봤고, 안 해본 게 없었다. 10년 동안 여러 상사와 일을 해봤는데, 회식 장소를 고를 때 까다롭지 않게 구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왜들 그렇게 회식에 진심인 건데!


어느 상사는 회식 장소만 두 시간을 보고하게 한 적이 있다. 이쯤 되면 일부러 괴롭히려고 그러나? 싶을 지경인데. 그냥 그 사람은 회식에 진심이었다. 최대한 맛있는 음식과 넘치는 술을 회사 돈으로 눈치껏 먹고 싶다는 진심.


또 다른 상사는 '너희들 먹고 싶은 곳으로 골라'라고 말하고는 회식 직전에 장소를 바꾸기 일쑤였다. 선택권을 주는 척하면서 시간 낭비만 시켰다. 그리고 그 사람의 선택은 언제나 최악이었다.


그들은 마음에 드는 회식 장소를 보고하지 못하면, 반드시 실망을 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알잘딱깔센'.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자신의 입맛과 그날의 기분과 무드, 가격대까지 완벽한 식당을 원했다.


난 그럴 때마다 외치고 싶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고!"


한 때는 상사의 마음에 쏙 드는 회식 장소를 바로바로 제시할 줄 아는 부하 직원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온갖 맛집 리스트를 찾아서 저장해 두고, 평소 상사가 좋아하는 식당을 메모해두기도 했다.


그럼에도 소용없었다. 내가 제안한 메뉴를 상사가 어제저녁에 먹었을 거라곤 알지 못했고, 내가 찾은 식당을 상사가 최근에 다녀왔다는 것도 몰랐으니까. 최근 비건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것도 알 턱이 없고.


나는 회식 장소를 찾는 데 쓰는 시간이 제일 아까웠다. 그래서 나중엔 우유부단하게 굴었다.


-뭐 먹고 싶어? 회식 장소 좀 정해봐.
-저는 돌도 씹어먹을 수 있어요. 부장님 드시고 싶은 걸로 먹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에이, 그래도 돌을 씹어먹을 순 없잖아. 먹고 싶은 거 편하게 말해 봐' 하고 또다시 바통을 넘기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버티다 보면 결국 본인이 먹고 싶은 걸 하나 던진다. 그걸 덥석 물면 회식 장소 확정!


그게 안 될 때는 적당히만 찾는다. 일단 함께 갔던 식당 중에 상사가 좋아했던 곳이나 내가 가본 곳 중에 괜찮은 곳, 일대에서 유명한 곳 등을 추려서 제시한다. 모두 거절당하면 네이버지도를 켜고 회사나 지하철역 근처의 식당을 검색한 뒤 평점이 높은 곳 몇 군데를 제시한다.


물론 메뉴를 제시할 때는 가격대도 잘 봐야 한다. 부서 회식 예산을 알려주는 상사는 없다. 1인당 최대 3만 원 이내로 먹을 수 있는 곳을 골랐다. 술은 별도. 하지만 이 모든 게 먹히지 않는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저번에 갔던 OO고깃집 어떠세요? 밑반찬이 맛있고 고기도 구워줘서 편하더라고요.
-좀 헤비 하지 않나?
-그럼 OO횟집은요? 저번에 광어 실하다고 좋아하셨잖아요.
-그래, 그럼.
-네. 예약하겠습니다.
-잠깐만. 회사 근처에 장어집 생겼다고 하지 않았어? 거긴 어때?
-네. 거기도 평이 괜찮더라고요. 거기로 가볼까요?
-아, 근데 가격이 좀 세겠네. 이자카야 같은 데로 찾아봐봐.
-얼마 전에 미팅했던 OO이자카야가 있는데요. 메뉴도 다양하고 깔끔해서 거기서 회식 자주 하더라고요. 거긴 어떠세요?
-거기 지난주에 갔었어. 분위기 괜찮긴 한데, 이참에 새로운 데 뚫어보자.


이게 무슨 스무고개인지, 신종 고문인지, 텔레파시 게임인 건지. 이런 일들을 꽤 많이 겪었다. 좀 연차가 쌓이고부터는 그 역할이 후배들에게 가곤 했는데, 난 후배들이 제시한 식당은 무조건 좋다고 했다.


회식은 업무의 연장선이다. 거기서 내 꿈을 펼칠 이유가 없다. 적당한 곳에서 간단히 먹고 일찍 들어가 쉬는 게 최고의 회식 아닐까. 퇴사 후엔 이런 자잘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건 참 땡큐다.


그런데 갑자기 웬 회식 타령이냐고? 외장하드를 정리하다가 오랜만에 맛집 리스트들을 모아놓은 걸 봤다. 열심히 했던 사회생활의 흔적을. 이제 암모나이트 화석 같은 느낌이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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