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짝 마른 말표 빨래 비누 세 개
헤지고 낡은 옷. 꾸깃꾸깃한 비닐봉지.대나무숲.
by
시안
Sep 2. 2024
서울을 벗어나
우리가 처음으로 시골 생활을 시작했던 곳은
그야말로
가난하고 외진
남도의
깡촌
마을이었다.
온 동네 살고 있는 주민이래 봐야
열 가구쯤 스무 명도 채 되지 않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고
그 주민들 대부분은
나이 드신 할아버지 할머니들뿐이었다.
몇 가구는
개인사 복잡한 자식들 대신
손주를
키워주는 조손가정이었고
가난한 편부모
가정이었다.
또
마을 외곽 쪽에는
외롭게 홀로 사시는 노인분들도
몇 분 계셨다.
우리가
그 외진 마을에
도착해 짐을 풀던 날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고
집을
삼면으로 배앵둘러 포진해 있던 논에는
막 모내기를 마쳐 물이 가득했고
와글와글
개구리
소리가
굉장했었다.
어디 있는 누구 집에
서울에서 젊은 부부가 어린애들 데리고
이사를 왔다더라. 하고
삽시간에
소문이 났던지
조용하고 무료했던 그
동네에
우리는 큰 이슈가 되었다.
한밤중에
서울에서 짐도
단출하게,
당시 사정상 우리 살림은 서울 아파트에 두고
이삿짐 트럭도 없이
꼭 필요한 옷가지며
이불. 책만 챙겨
내려갔으니
어르신들 보기에
모양새는 딱
뭔가 깊은 사연이 있어
애 둘 데리고
야반도주해 온
가족 모습
딱 그거라 생각들을 하신
모양이었
다.
우리가
이사 온 지
며칠이 지났을
때
떡이랑 돼지 머리고기를 맞춰
각 집마다 선물하기 좋게 이쁘게 포장을 한 다음
큰 애를 앞장 세우고
둘째를
유모차에 앉혀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어르신들께 인사를 했다.
마을 가장
끄트머리
대나무 숲 근처에는
한쪽 벽이 무너져 가는 흙
집이
있었는데
연로한
할아버지가
홀로 사셨다
할아버지는
젊은 부부가 촌
동네에
들어와 산다니 기쁘다 하시며 나에게 집들이 인사 답례 선물을 내미셨다.
먼지가
허옇게 내려앉고
구깃구깃 구겨진 검은
비닐봉지 속에는
생산 연도를 알 수 없는
아주 오래된
하얀
말표 빨랫비누 세
장이 들어있었다.
그 빨래
비누는
모르긴 해도
할아버지 집 한구석에서
족히 십 년은 있었을 비누로 보였는데,
이사 온 이웃에게
줄 선물을 급히 찾다
할아버지는
그 빨랫비누를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할아버지가 수줍게 나에게 그 봉지를 내밀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되돌아가시고 나서
검은 비닐봉지를
조심히 펼쳐 보았을 때
그 봉지 속에 든
빨랫비누를 보다가
나는 울컥 했다.
음...
이건 참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인데.
빼짝 말라 쩍쩍 갈라진 빨랫비누 모습에서
그
할아버지가
오랜 시간 홀로
외롭게
지독히도 고단한 삶을
살아
오신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비누를
남편한테 내밀고서
ㅡ이거 봐. 대나무
집
할아버지가
낮에 주고 가셨어.ㅡ
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남편 표정 또한
내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나
는
그 비누를 아껴 썼는데,
마음이 심란한 날에는
그 비누로 빡빡빡 힘차게 문지르며 손빨래를
했고
훌렁훌렁 헹군 다음
볕 좋은 마당에 나가 탁탁 털어
빨랫줄에 널고 나면 속이 시원했다
동네 마실을 나갈 때
한 번씩 마주치는
대나무 숲 할아버지는
옷차림은 늘 남루했고
언제나 술이 거나하게 취해 계셨으나
마실 나온 나와 아이들을 보면
큰소리로 반갑게 먼저 손 인사를 보내셨다
그
동네를 떠나온
후에
욕실에 쭈그리고 앉아 손빨래를 할 때는
아주 가끔
대나무
숲
무너져가는 흙집 할아버지의 잔상이
빼짝 마른 빨랫비누와 함께 떠오른다.
대나무 숲 바람
이는
무너져가는 흙집에
홀로 외롭게
사시던
할아버지
어쩌면
이젠 돌아가셨을지도 모르겠다
벌써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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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nch Book
그 사람이 남긴 잔상
01
빼짝 마른 말표 빨래 비누 세 개
02
황구 메리를 등에 업고 장에 팔러 가는 할머니
03
꼬깃꼬깃 접은 오천원과 생일 파티
04
말 타는 신부님들
05
백발 할아버지와 송아지
그 사람이 남긴 잔상
brunch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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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구 메리를 등에 업고 장에 팔러 가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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