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안 Sep 02. 2024

빼짝 마른 말표 빨래 비누 세 개

헤지고 낡은 옷. 꾸깃꾸깃한 비닐봉지.대나무숲.

서울을 벗어나

우리가 처음으로 시골 생활을 시작했던 곳은

그야말로

가난하고 외진

남도의 깡촌 마을이었다.


온 동네  살고 있는 주민이래 봐야

열 가구쯤 스무 명도 채 되지 않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고

그 주민들 대부분은

나이 드신 할아버지 할머니들뿐이었다.


몇 가구는

개인사 복잡한  자식들 대신

손주를 키워주는 조손가정이었고

가난한 편부모 가정이었다.

마을 외곽 쪽에는

외롭게 홀로 사시는 노인분들도

몇 분 계셨다.


우리가

그 외진 마을에

도착해 짐을 풀던 날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고

집을 삼면으로 배앵둘러 포진해 있던 논에는

막 모내기를 마쳐 물이 가득했고

와글와글 개구리 소리가 굉장했었다.


어디 있는 누구 집에

서울에서 젊은 부부가 어린애들 데리고

이사를 왔다더라. 하고

삽시간에 소문이 났던지

조용하고 무료했던 그 동네에

우리는 큰 이슈가 되었다.


한밤중에 서울에서 짐도 단출하게,

당시 사정상 우리 살림은 서울 아파트에 두고

이삿짐 트럭도 없이

꼭 필요한 옷가지며 이불. 책만 챙겨 내려갔으니

어르신들 보기에

모양새는 딱

뭔가 깊은 사연이 있어

애 둘 데리고 야반도주해 온 가족 모습

딱 그거라 생각들을 하신 모양이었다.


우리가 이사 온 지 며칠이 지났을 

떡이랑 돼지 머리고기를 맞춰

각 집마다 선물하기 좋게 이쁘게 포장을 한 다음

큰 애를 앞장 세우고 둘째를 유모차에 앉혀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어르신들께 인사를 했다.


마을 가장 끄트머리 대나무 숲 근처에는

한쪽 벽이 무너져 가는 집이 있었는데

연로한 할아버지가 홀로 사셨다

할아버지는

젊은 부부가 촌 동네에 들어 산다니 기쁘다 하시며 나에게 집들이 인사 답례 선물을 내미셨다.


먼지가 옇게 내려앉고

구깃구깃 구겨진 검은 비닐봉지 속에는

생산 연도를 알 수 없는

아주 오래된

하얀 말표 빨랫비누 세 장이 들어있었다.


그 빨래 비누는

모르긴 해도

할아버지 집 한구석에서

족히 십 년은 있었을 비누로 보였는데,

이사 온 이웃에게 줄 선물을 급히 찾다

할아버지는 그  빨랫비누를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할아버지가 수줍게 나에게 그 봉지를 내밀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되돌아가시고 나서

검은 비닐봉지를 조심히 펼쳐 보았을 때

그 봉지 속에 든

빨랫비누를 보다가 나는 울컥 했다.

음...

이건 참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인데.


빼짝 말라 쩍쩍 갈라진 빨랫비누 모습에서

할아버지가

오랜 시간 홀로 외롭게

지독히도 고단한 삶을 살아오신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비누를

남편한테 내밀고서

ㅡ이거 봐. 대나무 집 할아버지가

낮에 주고 가셨어.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남편 표정 또한

내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비누를 아껴 썼는데,

마음이 심란한 날에는

비누로 빡빡빡 힘차게 문지르며 손빨래를 했고

훌렁훌렁 헹군 다음

볕 좋은 마당에 나가 탁탁 털어

빨랫줄에 널고 나면 속이 시원했다


동네 마실을 나갈 때 한 번씩 마주치는

대나무 숲 할아버지는

옷차림은  늘 남루했

언제나 술이 거나하게 취해 계셨으나

마실 나온 나와 아이들을 보면

큰소리로 반갑게 먼저 손 인사를 보내셨다


 동네를 떠나온 후에

욕실에 쭈그리고 앉아 손빨래를 할 때는

아주 가끔 대나무 숲

무너져가는 흙집 할아버지의 잔상이

빼짝 마른 빨랫비누와 함께 떠오른다.


대나무 숲 바람 이는

무너져가는 흙집에

홀로 외롭게 사시던 할아버지

어쩌면

이젠 돌아가셨을지도 르겠다

벌써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낡은

#깡촌#허름한#흙집

#이사#집들이#답례품

#대나무

#빨래비누#말표#할아버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