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휴게소에서 천 원에 파는 국수 면발을 쉼 없이 흡입하는 내 모습을 보던 엄마는 보다 못해 한마디 하셨다.
"얘는 왜 이렇게 밀가루 음식을 좋아해!"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미취학 아동 그러니까 유치원생 시절로 기억한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그 이후로 30년이 지난 지금도 밀가루로 만든 면요리에 환장을 한다. (이쯤 되면 '그 면이 그 면이 아니고 그 면이었어?'라는 생각에 배신감을 느끼셨을 분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며 오늘은 한국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대만 '면麵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 ^^ -
편식이 심했던 어린이는 이제 더 이상 편식은 안 하지만 라면을 포함한 면요리는여전히 삶의 동반자처럼 사랑한다. 면으로 만든 음식이라면 종류와 국적을 가리지 않기에 타국을 방문하면 꼭 먹어보는 것이 그 나라의 맥도널드와 스타벅스(이건 그냥 기분 내려고) 그리고 면요리이다.
얼마나 면을 좋아하는지 일본에서는 하루 세끼를 라멘과 우동으로만 해결한 적도 있었고, 베트남에서는 아침에 눈 뜨면 일단 길거리에서 파는 쌀국수를 한 그릇 먹고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는 맥주를 마신 후에 밀려오는 허전한 속을 또다시 쌀국수로 달랜 후에야 잠자리에 들고는 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봉사 활동을 갔을 때 현지 음식이 살짝 안 맞을 때(다 먹기는 했다) 어쩌다 '미고랭'이라는 짭조름한 비빔면이 나오면 며칠 굶은 새끼 고양이 마냥 걸신 듯이 먹었고, 태국에서는 길거리에서 팟타이(볶음면) 접시에 코를 박고 소스의 새콤달콤한 향과 땅콩가루의 풍미를 느끼며 흡입을 했다.
아, 이건 여담이지만 그렇게 면요리에 환장하는 내가 '까르보나라는 30살에 유럽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처음 먹어 봤다' 그전까지는 스파게티는 빨간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진한 우유처럼 하얀 빛깔의 까르보나라를 알게 된 이후로 그 맛에 빠져서 한국으로 올 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직접 해먹기도 할 만큼 면요리 중독자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지금까지 대만 면 이야기를 하기 위한 MSG는 충분히 넣은 듯하다. 원래 면요리의 생명도 MSG 아니던가.
대만, 多양한 면
제목에서도 언급했지만 대만에는 꽤나 많은 면요리가 있는데 한국에는 우육면 정도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현지에서는 우육면보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면요리들이 더 서민들 삶에 보편적으로 녹아 있는데, 아무래도 우육면은 소고기가 들어가기 때문에 싸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물가와 환율 상승으로 한화 4,500원 ~ 5,000원 정도인데 여행객 입장에서 큰 부담 없는 금액이지만 현지에서 한 끼 식사 가격으로 결코 싼 음식은 아니다.
대만에도 '짜장면?' 그리고 '마장면'
'짜장면 炸 醬 麵' 발음을 옮기면 '자장 미엔'이다. 우리가 아는 짜장면과 발음이 꽤나 유사하지만 맛은 전혀 다르다. '炸 의 뜻' 은 '튀기다'라는 의미지만 실제로 튀긴 재료는 딱히 없는 듯하고 약간 매운 간장 맛이 나는 소스에 면을 비벼 먹는 느낌이다. 최근 한국에도 대만식 짜장면을 파는 식당들이 생겨나는 듯하다.
<이름만 같을 뿐 대만 특유의 장맛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한국인 입맛에도 제법 잘 맞다. - 사진 : google>
'마장면 麻 醬 麵' 중국어 발음은 '마장 미엔'인데 여기서 '마'는 '마라(麻辣) 탕 할 때 쓰는 마와 같은 한자어'이지만 그렇다고 마라탕처럼 매운 음식은 전혀 아니고 깨와 땅콩으로 고소한 향을 품고 있다. 보통 면을 파는 가게에서는 같은 면에 소스만 준비를 하면 되기 때문에 같이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둘 중 하나를 추천한다면 고소한 향이 일품인 마장면을 추천한다. (번외로 '마약麻藥'과 '마취麻醉'의 한자어도 동일하게 '삼 마麻'를 쓴다)
게다가 대만에서는 면의 종류를 고를 수가 있는데 보통 '얇은 면', '굵은 면', 칼국수처럼 '넓은 면' 크게 3종류가 있다. 흑당 버블티를 마실 때 얼음 양과 당도 선택을 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면의 양은 소박한 편이라 건더기가 있는 국물을 같이 곁들이면 양이 적당하다 - 사진 : google>
대만 생활 3년 차에 알게 된 '검은 깨면(黑芝麻麵)'
검은 깨면은 가오슝에서 3년 넘게 거주했지만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타이베이로 이사한 후에 집 근처우연히 발견한 식당에서 처음 먹어보게 되었다.
검은 깨면은 말 그대로 '고소한 검은깨와 면' 내가 좋아하는 2개가 합쳐진 환상의 조합이었는데 한입 가득 넣고 오물거리면 입안에 퍼지는 그 달달 고소한 향에'음 ~'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한 번은 가깝게 지내던 한국어 선생님 한 분을 데리고 갔는데 한참을 말없이 드시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맛있어요"라고 말하는데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보다 더 오래 대만에 거주하셨지만 '이 분 또한 검은 깨면은 처음'이라고 하셨다.
조심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면 이건 검은깨 그러니까 '검은색'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성과 같이 가서 먹을 때는 말을 아껴야 하며, 특히 치아를 보이면서 웃으면 안 된다. (이에 끼어버린 고춧가루보다 더 강력하다. - 이건 나의 경험담이니 꼭 귀담아들을 것!)
<보통은 바닥에 장을 붓고 위에 면을 넣어주는데 비비면 사진처럼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출처 : jatravelstory.com>
극한의 깊은 감동 '양춘면 (陽春麵)'
당시 만나던 대만 여자 친구는 면요리에 환장하는 나를 보더니 여기도 맛있다면서 어느 허름한 가게 안으로 안내를 했다. 대만의 영세한 식당들은 한국인 시선에서 보면 다소 허름하게 느껴지고는 하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식당들이 특별한 꾸밈없이 있는 것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이다.아마도 식탁과 의자를 치워놓으면 '여기가 식당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알고 보니 그게 '겉치레 없는 대만의 문화'였다.
<낡은 식탁과 빛바랜 그릇에서 지난 시간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식사의 일부분이다>
얇은 면 한 줄 한 줄에 들어간 정성
양춘면의 경우 가게마다 다르지만 내가 갔던 곳은 사장님이 면을 익힌 후에 소스가 충분히 베이도록 30초 정도 열심히 비벼서 주시는데 한입 가득 입에 넣는 순간 사장님이 그렇게 비벼주신 이유가 다 이해가 된다.
'그때의 양춘면' -바뀌지 않은 모습 그대로이길-
한 번은 친한 친구 녀석이 가오슝을 놀러 왔을 때 데려간 적이 있는데 한국에서 심신이 지친 채로 대만에 왔던 친구는 이것을 먹고단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상헌아, 이거 감동이다"
'맛있다'가 아니라 '감동' 이라니. 고백을 하는 아이처럼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이후로도 친구는 대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일주일간 대만 여행을하면서 가장 기억 남는 게 바로 이 양춘면이라고 한다. 가격은 단돈 45元 당시 환율로 1,800원 정도였다. 단 돈 1,800원으로 친구는 평생 잊지 못할 한 끼를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친구에게 잊지 못할 한 끼를 대접했다는 생각에 지금도 감사할 뿐이고.
PS. 다시 간다면
그리운만큼 걱정이 있다면 언젠가 다시 대만을 가게 되었을 때 '간판도 없고 구글 지도에도 안 잡히는 이곳' 이 다른 간판이 걸려있거나 혹은 없어졌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흔치 않은 외국인의 방문을 항상 기억해 주시던 해맑은 미소의 아주머니와 땀으로 범벅인 티셔츠에가는 팔로 양춘면을 비벼주던 할아버지.
다 먹고 난 후에 '하오츠'라는 한마디에 해맑게 웃어주시며 답해주던 아주머니의 표정은 하얀 도화지를 주면 그대로 그릴 수 있을 만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것은 단돈 1,800원으로 그 어디서도 살 수 없는, 잊을래도 잊을 수 없는 '극한의 감동' 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