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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마레지구

우리의 처음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던 그곳에서부터

by 흰남방



4-3.jpg 꿈속의 봄


마레의 어느 카페에 앉아 책을 읽던 중

한 그림자가 글자 위로 드리웠다.


그림자를 따라 가보니

창 밖 너머 햇빛 사이로 해맑게 웃고 있는

네가 있었다.






정신이 아찔했다. 순간 눈을 떠보니 시곗바늘은 새벽 세시 어디쯤을 말하고 있었고 식은땀을 흘린 채 적막한 방 가운데 홀로 누워 있었다. 꿈이었다. 그 영화 같았던 순간이. 한동안 괜찮더니 왜 꿈에 다시 나온 것일까.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날이 가까워져서 일까.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나 보다.


누운 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창 밖으로 빗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새벽부터 빗방울이 떨어진다는 예보를 들었던 게 떠올랐다. 다행히 주말의 새벽이었고, 다음날 특별한 약속이 없으니 원치 않는 외출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상하게 요즘의 파리는 평소와 달리 거친 봄비를 온몸으로 맞고 있다. 옅은 흰 커튼 뒤로 비치는 가로등 불빛을 보니 방금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우리의 처음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던 새벽부터 이었던 것 같다.




남다른 봄비가 내리던 4월의 어느 날이었다. 동이 틀 무렵 무거운 빗소리로 인해 잠에서 깨었다. 잠결에도 창문 너머 들려오던 빗소리 탓에 그날의 하루가 걱정되었다. 비를 싫어하는 너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나로 인해 일정까지 바꿔가며 힘겹게 오게 된 파리인데. 그런 걱정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오히려 비가 와 다행이라며 꿈속에서 막 벗어난 목소리로 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떨어지지 않고 하루 종일 붙어 다닐 수 있겠다.”


비를 싫어하던 너도 이 날 만큼은 비가 좋다고 하였다.

그러한 너의 배려에 오히려 내 마음속의 비구름이 개었다.


4-0.jpg 비 내리는 마레지구



봄날의 포근한 파리를 기대했기에 여행가방에는 얇은 옷들로 가득했다. 나무 선반 위로 놓인 텔레비전에서는 비로 인해 꽤 추운 날씨이니 건강에 유의하라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지고 온 옷들을 겹겹이 껴입고 우산 하나와 가벼운 짐만 챙긴 채 파리의 거리로 나섰다. 혼자 써도 막아내기 벅찬 비인 줄 알면서 굳이 하나의 우산만 챙겼다. 서로의 간격이 멀어지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란히 걸어 마레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혼자의 산책 후 항상 가는 카페가 있다. 그곳에 꼭 같이 가고 싶었다. 낡은 나무 위로 칠해진 파랑과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의 노랑을 닮은 탁자가 경사진 골목길 위에 놓여 있다. 누군가가 수줍은 라벤더를 투명한 물병에 꽂아 탁자 위 조심스레 올려 두었다. 그 옆에는 오래된 성당과 높은 담벼락이. 그것들 위로 자란 담쟁이넝쿨이 파리의 계절을 미리 알려주는 곳. 그래서 스스로 의식하기도 전, 어느새 서있게 되는 곳이라 생각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적었다. 가끔은 혼자서 이곳에 오는 것이 꽤나 외로운 일이라 너에게 말하였다. 오늘 같은 날이 오기를 상상하며 책 한 장을 넘기지 못한 날도 있었다 하였다. 문득 그곳의 파랑과 노랑이 마음에 들어서, 담벼락 위로 자란 담쟁이넝쿨의 영롱한 빛깔에 반하여서, 수줍은 라벤더의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주는 위로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지막한 카페의 2층에 앉아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언젠가 그들 속에서 꼭 잡은 두 손과 함께 이곳으로 들어오는 우리를 상상한 이유인 듯하였다. 삶보다 더 풍요로운 상상들을 너에게 하나씩 들려주었다. 그 상상들은 함께 나누고자 하는 바람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비를 핑계로 그곳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씩 날이 밝아지더니 적어도 오늘 안에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비도 자연스레 그쳤다.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가보기로 했다. 비가 그친 탓에 더 이상 우산을 쓰지 않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간격을 유지한 채 마레의 골목을 걷기 시작하였다.




단순히 파리 여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첫 산책이 마레의 어느 골목이기에 이리도 나를 괴롭히는 걸까.


비 오는 날의 파리는 겪어낸 기억 속의 감정들을 지나칠 만큼 예리하게 다듬어 되돌려 준다. 다듬어진 것은 무엇보다 아름답다. 그러기에 마음 한편이 아릿하다. 파리에서의 삶이 좋다가도 내일 당장 떠나겠다는 다짐을 한다. 다음날 공항으로 나서다 마주하는 풍경위로 깨어진 감정의 조각들이 배열된다. 그것들은 메마른 마음에 난 상처 위로 포개어 덮이는 바람에 스스로 괜찮다 망각하며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지금도 나는 그 카페, 같은 자리에서 여전히 책을 읽고 글을 적어 내려가고 있다. 바뀐 것은 없다. 밖에서 바라보는 낡은 나무의 파란 외관과 노랑 탁자와 의자 또한 그대로이다. 그때와 달리 주인 잃은 의자 하나가 옆에 놓여 있고 애써 적어 내려가는 글 속에는 누군가 있다는 것.


단지 그 정도만 바뀌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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