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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의 나만의 아지트

그대가 나를 따스히 품에 안아 줬으면 싶을 때

by 흰남방



고민이 많거나, 생각이 많아지는 밤.

바쁜 일상에서 잠시 일탈하여 쉬어 가고 싶은 날.

그대가 나를 따스히 품에 안아 줬으면 싶을 때.


과연 나에게는 나만의 아지트가 있을까.

그러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요즈음의 날들.


누구든 살고 있는 곳에

잠시나마 쉬어 갈 수 있는 곳 하나쯤은 만들어야 하는데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타종소리 너머의

밤 구름을 바라보며

그 조차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서글퍼진 밤.






그런 날은 울적한 마음이 예고치 않고 찾아온 날이다. 지친 하루의 끝에 돌아온 집에선 적막만이 반긴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 위로 소리 없이 쓰러진다. 하지만 차갑게 식은 이불 때문에 되려 잠이 깨어버리는 마법 같은 밤.


눈을 감은 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해본다. 무수히 떠오르는 걱정을 넘겨보려 애쓴다. 그러다 내일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 생각을 해본다. 그러한 생각의 끝은 어디론가 떠나도 된다는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잘 짜인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잠시라도 멈춘다는 것은 생각보다 크나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이곳에서는 더욱이. 그런 고민의 끝에 떠오른 건 어릴 적 할아버지 집의 다락방. 쾌쾌한 곰팡이 냄새와 먼지로 가득하던 그곳은 어릴 적 추억을 숨겨 둘 수 있는 나만의 아지트라 부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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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지내고 있던 낭시의 자그마한 빵집이 떠올랐다. 학교를 가기 위해 늘 지나쳐야 하는 빵집이 하나 있었다. 그 빵집 앞에는 전철역이 하나 있는데 이름은 마지노(Maginot) 역. 흔히 말하는 마지노선의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최후의 아지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곳.


평소에 읽고 싶던 책 한 권 만을 챙겨 그곳으로 가볍게 향했다. 빵을 굽는 냄새가 가득하였고 그것들을 가지런히 진열하여 판매하였다. 즐겨먹는 빵 하나와 커피를 들고 이층으로 올라가 창가 한 편에 자리 잡았다. 이곳의 탁자와 의자는 무거운 갈색 빛을 띠는데 그것들은 겉보기와 달리 여기저기 사람들의 오래된 손길로 반들거렸다. 환하게 트인 창 밖으로는 봄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특별한 게 없던 그곳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따뜻한 커피 한잔과 달콤한 빵, 그리고 그날의 풍경이. 그 이후로 마음이 체한 듯한 날에는 동일한 자리에서 똑같은 것을 먹었다. 그러고 나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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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시의 빵집처럼 파리에는 하나의 아지트가 있다.

파리의 중심 샤뜰레에서 마레지구로 이어지는 그 어디 사이쯤 건물 모퉁이에 위치한 카페이다.


도로에 접하는 외벽의 대부분이 검은색의 틀과 유리로 마감되어 있다. 그 덕에 시야가 트여있고 볕도 잘 든다. 날이 좋을 때는 한쪽 벽의 창문을 다 열어 안과 밖의 경계를 지운다. 여름에는 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늘이 카페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온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흔들리는 나무의 그림자가 탁자 한 구석에 닿아 움직인다. 거기다 좋아하는 긴 나무 탁자가 경계 위로 놓여 있다. 언제 가든 그곳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기다란 탁자에 앉아 책을 읽다 마주치는 직원의 눈빛, 그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파리의 풍경, 책위로 어른거리는 나무의 그늘. 그리고 직접 볶는 커피의 냄새까지.


특별한 듯 나열했지만 지극히 평범한 풍경들이다. 평범한 풍경 속의 특별함을 구태여 찾는 노력은 아지트를 위한 조건이 아니다. 언제 가도 늘 그 자리에 있다는 것.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비가 내려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 내가 머무는 곳에서 언제든 똑같은 풍경 속 잠시나마 머물 수 있는 아지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지친 일상에 큰 위로가 되어준다.


1, 2년에 한 번쯤 울적한 마음이란 게 시린 겨울의 중간에 혹은 초록빛이 찬란히 부서져 거리 위로 쏟아지는 한 여름에 오기도 한다.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 순간은 꼭 오기에 언젠가부터 준비를 하게 되었다. 때론 떠남의 이유를 찾아야 할 때 찾아둔 아지트의 존재만으로 충분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시간과 노력이 꽤 필요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낯선 곳에 머물며 지키려 부단히 노력하는 하나의 규칙이다.


머무는 곳에서 나만의 아지트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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