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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의 '햇살 처방전'

꾀많은 난쟁이의 크리스마스 선물

by 흰남방



바스러지는 낙엽이 길거리 한편에 차곡히 쌓이기 시작할 때 이곳은 기나긴 우기를 시작한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의 날은 흐리거나 흩날리는 비로 뒤덮인다. 첫겨울은 정말 습하고 시린 고통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겨울인 탓에 기억 속 어슴푸레한 나의 여름 집이 유독 사무치는 나날들.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햇빛을 쬐러 나가는 수고스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 하나의 겨울을 보내고 나니 그 속에서 햇볕을 온몸으로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해가 뜨는 날이면 삼삼오오 모여들어 볕이 잘 드는 곳에 앉아 웃으며 여유로이 그 시간을 즐기는 프랑스 사람들의 사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런 날이 좋았다. 비를 바라보는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기다려졌다. 조금씩 젖어가는 세상을 구경하며 커피 따위를 마시거나 책을 읽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했다. 심지어 비가 오는 날을 기다렸다 여행을 떠난 적도 있었다. 그런 날이 며칠, 몇 주가 이어지니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물이 달라서, 음식이 안 맞아 적응이 힘든 것이 아니라 햇볕을 보지 못하기에 생기는 문제들과 마주하였다. 잠에 쉽게 들 수 없거나 이유 없이 자리 잡은 음울한 감정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마음이 체하였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음에도 조금씩 체중을 빼앗겼다.


우선 글을 적는 것을 멈추었다. 기분 좋은 음악을 듣거나 비가 와도 산책을 나갔다. 땀을 흘리면 나아질까 싶어 뜀박질도 규칙적으로 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학교에서 하는 스포츠클럽도 나갔다. 가까이하지 않는 과일도 색깔 별로 챙겨 먹었다. 조금 나아지는 듯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다 옆의 마을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것을 핑계로 나의 걱정을 하던 F와 J는 나를 무작정 끌고 그곳으로 향하였다. 가까운 마을이었지만 머물던 곳과 달리 날이 잠시나마 화창 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내키진 않았지만 햇볕을 좀 쬐고 나면 한결 괜찮을 거라는 F의 결연한 표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사실 크리스마스 마켓을 처음 가보는 것에 약간의 호기심이 있기도 하였다.


카메라만 하나 챙긴 채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기로 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곳은 프랑스에서도 작고 작은 마을 중 하나이니. 도착하니 생각보다 볼거리는 많았다. 마켓 입구부터 키다리 광대 아저씨가 반겨주었고 그를 따르는 아이가 줄을 이었다. 적지 않은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니 맛있는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큰 솥에서는 슈크르트(절인 배추와 소시지로 만든 음식)가 가득했고 그 옆으론 크레페와 와플, 추로스 같은 달콤한 간식거리를 팔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빠질 수 없는 뱅쇼(와인을 계피와 설탕, 포도 등을 넣어 끓인 와인)가 한 잔씩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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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눈에 띄는 어느 집 계단 위로 올라섰다. 계속 앞을 보고 사람들을 조심하며 걸었던 탓일까. 고작 몇 개의 계단 위로 올라섰을 뿐인데 새로운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무엇보다 흐리던 하늘이 어느새 개어 있었다. 나직한 지붕들 끝자락엔 짙어진 겨울의 해가 걸려있었다. 서있던 계단은 그 볕을 받아서인지 같은 색을 뗬다.


뭉트러운 돌계단의 이끼를 피해 조심스레 앉았다. 잠시의 볕을 쬐기 가장 좋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행렬은 오늘 밤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어른들의 옅은 미소와 아이들의 순수한 눈빛은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의 것이라 생각했는데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의 빛은 점점 연한 보랏빛으로 나아갔다. 그 아래 지붕의 굴뚝에선 연기가 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마 크리스마스의 밤을 준비하는 꾀많은 난쟁이들이 굴뚝에 걸터 앉아 구름의 모양으로 그대로 꿰어다 하늘에 걸어 두었다 생각했다. 그것들은 어른들과 아이들을 위한 선물이 되어 이브날 머리맡에 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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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잠시 마주한 햇볕이었다. 오늘 밤 홀로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위로가 되었다. 잠에 쉬이 들지 못해 뒤척이지 않을 것 같았다. 수고스럽다 생각한 일이 나를 낫게 하고 있었다. 애초에 좋은 음식이나 약 따위로 나을 문제가 아니었다. F의 말이 맞았다. 프랑스인의 햇살 처방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돌아왔다. 여전히 보랏빛을 띠는 하늘 아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천천히 페달을 저으며 멀리 보이는 해걸음을 쫓아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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