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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뜨의 여름밤

여름밤의 꿈

by 흰남방



무더운 여름이 유일하게 좋아지는 순간은 서늘한 밤공기를 휘저으며 어스름 속을 걸을 때이다. 언덕의 여름밤은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음악소리와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말들로 새벽 늦은 시각까지 골목 구석구석 메워진다. 그 속에서 잘 마시지도 못 하는 맥주를 마신 뒤 약간의 취기와 함께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나머지 한 손에는 너의 손을 잡고 그 밤거리를 걷는 것. 그것도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에서. 너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순간.






파리 지하철 12호선의 Abbesses역. 깊고 어둡던 지하철을 벗어나니 오후의 환함으로 쉽사리 눈을 뜨지 못하였다. 구부정하게 휜 하나의 골목을 따라 언덕의 끝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높은 언덕은 아니지만 선택한 길목에는 적지 않은 계단이 있다. 그곳을 열심히 오르고 있으면 누군가의 피아노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온다. 가끔은 관악기의 한 종류이었고 때로는 바이올린의 현란한 음률이기도 했다. 주인 모르는 선율은 바람 속에 켜켜이 쌓여 들려왔다.


초록의 이끼가 얄팍하게 물든 계단들의 끝은 오후의 여름 해가 가까스로 닿는 곳이다. 악기 소리가 섞인 바람도 나아가다 결국 멈추게 되는 곳이기도 했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한 번쯤 쉬어가게 되는 곳이었으며 파리가 한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나름의 전망대. 그런 핑계들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자그마한 식당이 하나 있는데 봄과 여름 사이에 오면 좋다. 테라스에 앉으면 파리의 전체가 다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커피 한잔을 위한 시간을 위함이라면 충분하다. 뜨거운 커피를 마셔야지 생각하며 호기롭게 시작한 산책 도중 계단과 언덕길의 벅참에 의해 조금씩 현혹된다. 그리하여 그 다짐은 차가운 얼음 몇 개 넣은 탄산수에 밀려 허무하게 사라지게 된다. 그래도 나만큼이나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니 한 번쯤은 먼저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은 우유를 넣은 커피 한 잔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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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시원한 탄산수까지 마신 후에야 일어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성당 쪽으로 향했다. 근처에는 자그마한 광장이 있다. 화가들이 그림을 팔거나 즉석으로 그려주는 곳이어서 사람이 붐비는 곳 중 한 곳이다. 광장으로 지나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괜히 둘러갔다. 가위로 종이를 잘라 만든 실루엣을 파는 아저씨는 여전히 인기가 많았다. 관광객들은 그곳에 놓인 그림들에 흥미를 갖곤 하지만 실제로 그림을 사들고 가는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보지 못하였다.


한참 그림을 보다 해가 꽤 넘어갔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도착한 언덕의 정상. 성당 앞에 서 바라본 파리는 옅은 분홍으로 물들어갈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도시는 활기 차 보였다. 일 년 중 해가 가장 길게 머무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탓이었다. 계단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봤다.


언덕 윗부분에 놓인 사크레쾨르 앞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가로등에 매달려 아슬아슬하게 묘기를 부리는 사람. 뜨거운 여름밤에도 군밤을 구워내는 상인. 팔찌를 채우기 위해 아래에서 어슬렁하다 순찰 도는 경찰을 보고 피하는 집시. 목청 좋은 야바위꾼과 바람잡이. 여름밤이면 시원한 바람을 쫓아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물과 맥주를 파는 사람들. 불필요한 듯 불평하면서도 때론 필요가 되는 사람들. 그런 매일의 풍경이 어김없이 펼쳐졌고 사람들의 시선은 그곳에 머물다 지루해지면 파리를 음미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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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따라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새삼스러웠지만 내가 이곳에서 보낸 햇수를 헤아려 보려 노력했다. 억지로 되뇌었다. 그중 가장 앞줄에 서 있는 하루를 떠올렸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겨울. 숙소에 짐을 두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바로 몽마르뜨 언덕이었다. 예술가의 언덕. 그 자체만으로도 내가 꿈꾸었던 파리라는 환상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라 하여도 무방했다. 그래서 첫 번째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언덕 입구부터 나의 환상은 처참히 부서졌다. 억지로 팔찌를 채우는 사람의 팔을 뿌리치다 멍이 들었고 야바위꾼들이 호객하는 소리로 덮인 골목은 요란한 기념품 가게들과 수많은 관광객으로 인해 발 디딜 곳이 없었다. 그 뒤로 다시는 찾을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몽마르뜨 언덕에서 조금 늦어진 노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이면 자연스레 낮이 길어진다. 그중 가장 긴 오후가 가까워 온다는 것은 별 볼 일 없는 나의 생일이 가까워지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면 너는 축하를 핑계로 나는 선물을 핑계로 애써 꾸며낸 안부를 건네었다. 이번의 생일은 우리가 좋아했던 이곳의 밤을 핑계 삼아 볼까 해 언덕에 올랐다.




여름의 밤공기로 가득한 골목 사이사이를 누볐다.

주황빛으로 가득한 카페테라스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녹차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샀다.


그리고 그것을 한 손에

다른 한 손엔 너의 손을 잡고

몽마르뜨의 남은 밤거리를 마저 걸었다.


너에게만 들려줄

쓰여질 생일날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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