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너와 스쳐 지나가게 된다면
이곳에서 저편으로 나아가는 중 우리는 어쩌다 한 번 스쳐갔다. 그러다 너는 파리에 한 달 정도 꼭 살아보고 싶다 나에게 말했다. 첫 번째 줄에 적힌 바람이라 하였다. 그것은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말 또한 잊지 않았다.
누군가의 삶 속에서 단 한 번의 바람이라 불릴 만한 하루를 파리에서 일상처럼 보내고 있지만 적어도 나에겐 첫 번 째 줄에 적힐 꿈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어김없이 물어오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너의 질문에 나는 싱거운 단어들을 내뱉고 말았다.
감정의 상흔은 꽤나 오래간다. 아니,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사라졌다 오해했던 것들은 결국 바래진 것뿐이었다. 어디로 도망가지 못한 흔적들이 여전히 남았는데 외면할 뿐이었다. 파리에서 나열된 풍경은 행복과 슬픔, 분노, 좌절, 환희 같은 복합적 감정들의 집합과 동일하다. 책상 앞에 앉아 빈 공책을 편 후 그 위로 시간에 대한 감정들을 엮었을 때 단순한 도시가 아닌 나만의 파리가 기록되었다. 그것은 우연히 마주한 이가 파리의 삶이 어떠냐 무심코 물어보았을 때 대답을 주저하게 만든 이유들이 적힌 기록이었다.
파리에서 살아가기 시작한 첫 달은 이러하였다. 해가 질 무렵이면 에펠탑이 잘 보이는 곳에 가서 앉아 책을 읽고 와인을 마시다 돌아왔다. 다음 날은 커피가 맛있다고 소문난 곳을 찾아가 테라스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곳의 커피는 다른 곳보다 끝 맛이 달았으며 오렌지 향이 잠시 동안 혀 끝에 머물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날에는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고 들어온 뒤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하였다. 하루에 한 번. 한 달을 그렇게 꼬박 파리의 이곳저곳을 산책하였다. 그리고 그날의 사진들을 하루의 일기처럼 기록했다. 파리의 삶을 궁금해하던 질문의 답 이었고 나의 바람 첫 줄에 적힐 시간을 위한 노력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리에서 살고 싶었던 하지만 그러지 못하였던 너에게 비롯되어 파리에서 나의 첫 한 달이 만들어졌다. 그래서인지 그때의 너와 같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파리의 시간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를 만났을 때 네가 곁에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다시 한번 너와 스쳐 지나가게 된다면.
그때처럼 나에게 파리에 살아보고 싶다 말한다면.
너에게 한 달의 시간을 꼭 파리에서 함께 살아 보자 넌지시 말 할 것이다. 끝 맛이 달았던 카페를 다시 찾고 눈이 일찍 떠지는 날에는 파리의 공원을 나란히 걷다 막 구워낸 빵 한아름을 안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어스름이 질 때 센 강을 거닐다 악사의 음악소리가 잘 들리는 곳에서 와인 한 잔 나눠 마시고 멀리 반짝이는 에펠탑에 소원을 빌 것이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살포시 감은 너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볼 것이다.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가 하였던 것, 하지 못했던 것을.
한 달의 시간을 꼭꼭 눌러 담아 두 손 한 가득 쥐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