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는 날보다 사랑하는 날이 더 아팠다
사랑하지 않는 날보다
사랑하는 날이 더 아팠다.
쉽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어려워졌다.
파리는 나에게
조금씩 흐릿해져 갔다.
퇴근 후 집으로 가기 위해 바스티유 광장으로 걷고 있었다. 무언가 어깨 위로 툭툭하고 떨어진다. 비가 내리려 하나보다. 가방을 열어 우산을 찾았으나 보이질 않았다. 늦잠을 잔 탓에 급하게 나오느라 우산을 식탁 위에 두고 나온 것이 생각났다. 비가 온다는 예보를 듣고 까먹지 않기 위해 전 날 저녁 식탁 위 잘 보이는 곳에 일부러 올려 둔 것인데 그걸 잊고 나온 것이다. 그냥 걷기엔 빗방울이 꽤 굵어 잠시 몸도 녹일 겸 가까운 비스트로에 들어갔다.
하루 종일 서너 잔의 커피를 연거푸 마셨던 탓에 카페인이 아닌 다른 것에 갈증을 느꼈다. 식사를 하지 않겠다 말하고 고심 끝에 고른 것은 쇼콜라 쇼 한 잔. 커피와 무엇이 그리 다를까 싶었지만 적어도 카페인은 아니라는 핑계를 여러 번 되뇌었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식당 안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둘러보니 창가 구석 자리가 비어있었다. 사람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은 뒤 현상한 사진들을 확인했다. 며칠 전 집을 정리하던 중 다 쓴 필름이 꽤 쌓인 걸 보았다. 귀찮음으로 인해 행여 추억이 상하지는 않을까 유효기간을 걱정해야 할 지경에 이른 필름을 들고 현상소에 급히 다녀왔다. 언제 촬영하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필름이 태반이었다. 꽤 많은 사진들의 초점이 맞지 않거나 타버렸다. 그것들은 실패 혹은 실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확히 정의되지 않기에 그날의 감정들은 더욱이 날것이었다.
나만큼이나 그런 사진을 좋아하는 당신이 있었다. 선명하지 않은 풍경 너머로 순수한 상상이 펼쳐진다 내게 속삭였다. 유독 비가 오는 날이면 머릿속은 당신이 뱉은 문장들로 쉽게 번져졌다. 고인 빗물 위로 파리의 밤거리가 비치는 것처럼 머릿속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기억은 흙탕물처럼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한참을 사진을 보았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바닥까지 내려뜨려져 일렁이는 무거운 커튼 너머의 바스티유로 시선을 옮겨졌다. 그러다 나의 표정과 우연찮게 마주했다. 식당의 얄팍한 창으로 비치는 나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하였다. 나는 무언가를 참 잘 닮아가는 사람 같다고. 대체로 무표정을 지닌 나는 다르게 말하면 무언가의 표정을 쉽게 가질 수 있다는 말도 될 수 있다 하였다. 환하게 웃는 아버지의 웃음을, 무언가의 집중하는 어머니의 표정을, 장난기 가득한 당신의 눈빛을 나에게서 느낄 수 있다 하였다. 그런 나의 모습이 좋다고 하였다. 누군가의 표정을 쉽게 닮는 나는 그날의 저녁. 추적거리는 파리의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마음 한편이 주저앉는 느낌이 들었다. 이별을 말하며 눈물짓던 당신 앞에 서게 된 내가 과연 어떠한 표정을 지었을까.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지었을까. 아니면 당신의 표정을 닮아있었을까.
당신의 마지막에 나는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흐릿한 가면을 쓰고 그 뒤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는 사람. 아니면 그 가면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남자. 그러기에 마지막 그렇게 모진 말을 나에게 남겨두고 떠났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마음이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여전히 예쁜. 흐릿한 가면을 쓴 파리의 표정을 닮아가는 요즘의 내가 아닌 충분히 사랑받는 당신과 닮은 표정으로.
당신이 기억하고 있을 그날의 바스티유와 닮은 흐릿한 가면을 쓰고 있는 나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 가는 당신의 뒷모습과 꽤나 닮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