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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땡이 부리고 싶은 곳, 프랑스 물의 도시 비시

푸른빛의 눈부신 왕관을 품은 마을

by 흰남방



비시에서 프랑스어를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오전 수업 사이 휴식 시간이 찾아오면 자판기에서 달달한 커피를 한 잔 뽑아 불완전한 언어들로 특별한 것 없는 일상을 조금씩 더듬어 공유하였다. 아래는 친하게 지내던 R군과의 대화.



아침 먹었어?

응. 너는?

나도. 뭐 먹었어?

빵이랑 커피. 너는?

나도. 아 우유도 마셨다.

오늘 날씨 좋다.

그렇지? 이렇게 바람도 좋은데. 그러니깐 공부하기 싫어. 나갈까?

수업 남았는데?

알지. 그래도 나는 가야겠다. 더 이상은 못 있겠어.

어디 가는데?

음… 마을, 햇볕, 물도 있고, 바람. 나무 그림자도 있어. 그곳에 다녀올게. 오후 수업은 갈 거야!



하나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거나 혹은 사용하는 말이 다른 타지에서 살아가기 시작할 때 기본적인 욕구 표현을 우선적으로 습득하게 된다. 짧게 내 소개를 한 후, 상대방의 정보를 파악한다. 그리고 원하는 것들을 나열한다.


사실 수업 내내 창문 너머 들어오던 가을볕이 내 등을 교실 밖으로 밀고 있는 것 같았다. R에게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단어들을 겨우 조합해 그것을 설명하고 나가야만 하는 이유를 말하였다. 그는 내가 꽤 많은 것에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 인정하는 터라 어렴풋이 웃어 보였다.


휴식 시간이 끝나기 전 선생님 몰래 짐을 챙겨 학교를 탈출했다. 대단한 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런 것을 하지 않아도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은 자그마한 쾌락을 가져다주었다. 어릴 적 엄마 몰래 서랍 속에 숨겨두고 야금야금 먹던 초콜릿처럼. 학교를 나와 근처에 있는 마을의 약수터로 곧장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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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탈출해야만 했던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이곳. 지난 일요일 아침 우연히 지난 마을 약수터에는 햇살이 예쁘게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주말인 탓에 사람이 꽤 북적 였다. 한적한 평일에 오면 어땠을까.


프랑스어 학교가 있던 곳은 프랑스 중부에 위치한 비시(Vichy)라는 도시. 별칭이 ‘물의 도시’이다. 우리에게는 화장품 브랜드로 더 친숙한 이름. 그래서인지 ‘물’을 상징하는 색이나 문양 들을 마을 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그중 마을 약수터에는 나무로 조각한 장식이 있는데 굳이 말하자면 옅은 하늘빛 정도의 색으로 꾸며 두었다. 둥근 타원형의 건물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색과 퍽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곳을 채우는 아침의 햇살은 눈부셨다. 한 명 씩 약수터의 물을 받아 갔지만 그곳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탈출에 대한 죄책감은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 계절의 빛은 지금이 아니면 마주하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언젠간 이 도시 와도 이별을 해야 하니깐.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책을 읽다 그곳의 사진을 찍고 몇 줄의 문장을 적었다. 맞은편 강가에 있는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을 구경했고 뛰어다니는 강아지들을 보고 부러워하였다. 그러다 기나긴 생각 끝 짧은 단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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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의 옅은 꿈이었다. 들녘의 이끼와 꿈의 풀로 엮은 둥지에 누워 있는 듯했다. 커다란 둥지를 힘겹게 잡고 올라가자 비시의 풍경이 찬란히 펼쳐졌다. 아침의 햇살은 어느새 지평선 위로 황홀한 빛을 띠고 넓게 퍼져있었다. 그 아래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의 빛깔 또한 하늘과 동일했다. 둥지에서 뛰어내려 강수면 위를 비행하였다. 그렇게 마을의 내밀한 삶을 구경하고 그것들을 모아 둥지 한편에 숨겨 두었다. 그렇게 숨겨둔 것들로 부화된 것은 푸른빛의 눈부신 왕관일 것이라 확신했다. 비시의 햇살을 손으로 빚어낸 보석과 약수터의 있던 나무 장식과 퍽 닮은.


얼마나 잤을까. 비시의 햇살은 한국의 것보다 따뜻하다 못해 따갑기까지 하였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교실을 나가라고 등을 떠밀던 가을볕은 어느새 나의 단잠을 깨웠다. 순간 꿈속에서 본듯한 왕관과 비슷한 것을 찾아 아무렇게나 쓰고 비시의 구석구석을 걷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날의 산책을 손바닥 위에 일기로 남기고 싶어 졌다. 이날 이후 비시를 걷는 일은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잠깐의 일탈을 멈추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10-2.jpg 비시의 약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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