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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낭독공연, 감각을 깨우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입체낭독극 <돌 씹어 먹는 아이>

by 차차

1. 어둠 속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공연이 시작되기 전, 관객들은 안내에 따라 안대를 착용한다.
눈앞이 까맣게 가려지고, 서서히 어둠에 적응하기 시작하면 공연이 시작된다.


조용한 가운데, 돌로 내는 다양한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린다.

고양이 울음, 방울 소리, 그리고 관객 주변을 맴도는 발소리.

깃털이 팔을 스치기도 한다.
소리가 잦아들 즈음, 첫 대사가 울려 퍼진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연수예요.
전 시골 강가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랐죠.”


‘보이지 않는 무대’가 펼쳐졌다.
빛 대신 소리로, 향기로, 맛으로, 촉각으로 이야기가 전해진다.
눈을 감고도, 아니 눈을 감았기에 더 선명해지는 장면들이 있다.

입체낭독극 <돌 씹어 먹는 아이>는 그렇게 감각을 깨우는 시간이었다.



2. 동화가 낭독공연이 되기까지


공연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두 달 전부터 연습을 시작했다.

작품은 동화 <돌 씹어 먹는 아이>를 각색한 희곡이었다.



우리의 공연은 조금 특별했다.

시각적 요소를 배제하고 청각·후각·미각·촉각을 중심으로 구성된 감각 체험형 공연이기 때문이다.

정안인 관객도 안대를 착용하고 시각장애인과 같은 조건에서 관람한다.

마치 ‘어둠 속의 대화’의 공연 버전처럼, 보이지 않는 대신 더 깊이 듣는 시간이다.


현직 배우, 교사, 직장인 등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던 우리가 하나의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간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설레었다.

캐릭터를 표현하려면 평소의 내 모습을 깨야 했지만, 새로운 도전이 될 것 같아 마음이 들떴다.
연출 방향과 대본만 봐도 ‘이건 정말 재밌는 작업이 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첫 모임에서 대본리딩을 한 후, 배역이 정해졌다.

나는 주인공 연수의 엄마가 되었다.

따뜻하지만 푼수기도 조금 있는 캐릭터이다.

낯선 모습을 연기하는 게 쑥스럽기도 했지만, 연출님의 디렉션을 받으며 나를 조금씩 깨뜨려갔다.


연습이 거듭될수록 문장들이 점점 입체적으로 살아났다.

장면마다 감정을 찾아가고, 동선과 호흡을 맞춰갔다.

어느 날부터는 배경음악과 함께 연습을 했다.

그때부터 작품 속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음악의 힘으로 우리는 작품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배역끼리 합을 맞추며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간도 소중했다.

내 목소리와 표현이 어떻게 들리는지, 멤버들에게 듣고, 수정해 가며 디테일을 다듬었다.


마지막 공식 연습 날, 드디어 모든 소품이 도착했다.
눈을 가리고 듣고 느끼는 공연인 만큼, 사소한 소리와 냄새, 맛, 움직임까지 약속한 대로 표현해야 했다.
손끝에 닿는 작은 촉감 하나에도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다.

최종 런에서는 실제 공연처럼, 여러 소품과 장치를 활용해서 다양한 감각을 체험할 수 있도록 장면을 구현했다.
동화가 공연이 되어 움직이는 모습이 눈앞에 더욱 선명해졌다.




3.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


드디어 공연 날 아침이 밝았다.
비 예보가 있어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하늘이 맑게 갰다.

공연장에 도착하자마자 무대 세팅을 시작했다.
소품을 정해진 위치에 놓고, 음향을 점검하고, 의자 간격을 맞췄다.
공간이 완성되어 갈수록 기분 좋은 떨림이 느껴졌다.
리허설을 마친 뒤 대기실에서 대본을 다시 훑어보기도 하고, 배우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잠시 후, 관객들이 입장했다.
안내 멘트에 따라 모든 관객이 안대를 착용하자, 공간이 고요해졌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연수예요.”


그 순간, 공기마저 다른 질감으로 변했다.

누군가의 숨죽인 웃음, 누군가의 가벼운 놀람. 그 모든 반응이 공연의 일부가 되었다.


공간 속에서 오감이 하나씩 깨어났다.

숲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은은한 우드향과 꽃향이 공간에 번졌다.

물 스프레이로 만든 촉촉한 공기가 관객의 호흡을 적셨다.

부채를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자, 마치 숲 사이로 산들바람이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돌 씹어 먹는 아이들이 함께 노는 장면에서는 관객들에게 초콜릿 돌을 나눠주어 직접 씹어보게 했다.

머리 위로 천을 들어 구름을 만져보게 하고,

돌스프의 고소한 냄새를 느끼게 하기 위해 참기름을 살짝 바른 부채를 부치기도 했다.


소리와 향, 촉감과 맛을 통해 관객들은 한 장면 안에서 숲도, 바람도, 돌도, 구름도 모두 함께 느꼈다.

공연은 더 이상 단순한 이야기 전달이 아니었다.

그건 감각이 깨어나는 경험이었고,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이었다.


돌을 씹는 연수, 흙을 퍼먹는 아빠, 못과 볼트를 먹는 엄마의 고백이 이어지는 장면도 잊을 수 없다.

어둠 속에서 터져 나오는 관객들의 생생한 리액션이 배우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하마터면 덩달아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잘 참으면서 계속 몰입하려고 애를 썼다.




4. 불이 켜진 뒤에도 남은 여운


마지막 대사와 함께 한바탕 웃으면서 퇴장했다.

음악이 점점 커지며 공연은 막을 내렸다.


불이 켜지고 배우들이 관객 중앙으로 다시 등장했다.

안대를 벗은 관객들의 얼굴에는 여운과 놀라움이 함께 묻어 있었다.

특히, 시각장애를 가진 9살 친구가 환하게 웃으며 “공연이 너무너무 재밌었어요.”라고 말해주던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함께 상상하고 즐길 수 있는 공연.

시각장애를 가진 분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자리.

우리에게도, 관객들에게도 참으로 특별한 시간이었다.

관객 인사와 포토타임까지

모든 순간이 따뜻하고, 행복했다.




입체낭독극에서는 향기와 맛, 촉감 등을 자극하는 여러 장치들이 있었다.

다양한 감각을 통해 이야기를 전하는 경험은 내게 ‘낭독하는 마음’을 일깨웠다.


꼭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도, 목소리 그 자체로 오감을 깨우고 싶다.

오디오북으로 듣는 낭독일 수도 있고, 사람들이 함께 모여 책의 한 장면을 나누는 낭독회일 수도 있다.

어떤 형식이든, 소리 하나로 상상과 감정이 피어오르는 순간을 만들고 싶다.

텍스트를 섬세하게 바라보고, 글이 품은 빛깔과 향, 온도, 작가의 숨결까지 청자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보이지 않아도, 들려오는 세계.

그 세계를 내 목소리로 따뜻하게 전하고 싶다.




▼ 낭독하는 사서교사가 추천하는 책

송미경 『돌 씹어 먹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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