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영어 공부를 하며 찾은 것

by 뉴욕댁

첫 글을 쓰고 약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났다. 핑계 아닌 핑계를 대자면 몇 번 학교를 왔다 갔다 하면 금세 일주일이 지나가 있었다. 어디선가 나영석 피디가 뉴욕에서 어학원을 다니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대한민국의 대스타 피디가 바라는 그 꿈을 내가 지금 하고 있다니, 어찌 보면 나피디보다 내 팔자가 훨씬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여태껏 탱자탱자 놀다가 오랜만에 스케줄에 맞춰 아홉 시 정각에 학교를 가려니 몸이 말을 듣질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삼십 분만 참기로 다짐한다. 딱 9시 반까지만 참아보고, 그 이후에도 집에 가고 싶으면 그냥 가방 싸서 미련 없이 떠나기로. 그렇게 버티길 한 달, 그사이 나에겐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베네수엘라에서 손자를 봐주러 온 70대 할머니 빅토리아, 대학을 가기 전 영어 공부를 하는 테베로우라, 세네갈에서 온 쾌활한 친구 파투마타, 한인타운에서 일하는 귀여운 일본인 친구 나오미 등등. 몇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던 사람들이 내 인생에 들어왔다.


사람들과 친해지니 학교를 가는 발걸음이 더 이상 무겁지 않다. 아침 일찍 가면 나를 반겨주는 빅토리아와의 눈인사가 기다려지고,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30분의 쉬는 시간이 기대가 된다. 같은 반 친구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다. 고국에서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를 하다 미국에 온 친구가 있는가 하면, 트라이애슬론 경기를 주기적으로 나가는 친구도 있었다. 그들의 삶 이야기는 내가 이전에 듣도 보도 못한 삶이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여행하는 기분이다.


좋아하는 선생님도 물론 생겼다. 라이팅 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 오늘 수업에서 다룰 내용의 개요를 칠판에 차례로 적은 다음 최대한 그 계획에 맞게 수업을 진행하는 데 이게 아주 내 마음에 쏙 든다. 게다가 성격까지 좋으니 벌써 그와의 마지막 수업에 어떤 선물을 주어야 그가 좋아할지 고민이 될 정도다. 그래머 선생님은 눈감고 말하는 걸 들으면 할리우드 탑스타 젠데이아와 말투가 아주 똑 닮았는데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의의 수업이 겹치는 수요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일이 되었다.


점차 이곳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다져가며 마음속에 단단하게 굳어 있던 작은 응어리가 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응어리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좋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점점 유연해지는 나의 모습을 보며 내 안의 어딘가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오랫동안 쓰지 않고 있던 나의 마음 근육인지, 아니면 막연한 걱정이 뭉치고 뭉쳐 만들어낸 응어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 안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리스닝 연습을 한답시고 남편과 함께 그 유명한 HBO 드라마 화이트 로투스를 정주행 했다. 화려한 미감과 마이크 화이트 감독 특유의 맛깔나는 스토리텔링도 물론 기억에 남지만 나의 마음에 가장 남는 대사가 있다. 시즌 3에서 나오는 한 남자 주인공 중 한 명인 '릭'은 여자친구와 함께 고급 리조트에 왔음에도 계속해서 불안에 떨었다. 그는 과거 아버지로부터 받은 슬픔과 분노를 계속해서 끌어안고 살고 있는 캐릭터였는데 이런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가진 그에게 여자친구는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멘탈 카운슬링 프로그램을 받길 권유한다. 여자친구의 강제 등록으로 인해 그는 상담을 받게 되는데, 카운슬러가 그에게 그의 아이덴티티를 묻는 장면에서 그는 공허감 때문에 자신이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아이덴티티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그를 상담해 주는 닥터 암리타는 '그 또한 당신이 만들어낸 아이덴티티'라고 대답한다.


이 장면은 나에게 크게 와닿았다. 내가 스스로 만든 나의 아이덴티티는 과연 무엇일까?


학교를 시작하기 전, 나는 기껏해야 한국인 친구 혹은 비슷한 배경의 아시아인 친구나 사귈 줄 알았다. 그런데 70대 남미 할머니와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는 30대 백인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며 문득 내가 나 스스로 제한과 한계를 설정하고 살았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그간 내가 얼마나 갇힌 사고를 가지고 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래서 어른들이 큰 물에서 놀라고 하는 거구나. 충분히 큰 물에서 놀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우물 한 개구리였다. 그렇게 나의 응어리가 풀어지며 내 안에 설정해 놓은 나의 한계치 또한 사라지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내가 만든 하나의 아이덴티티로부터 벗어났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 안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현실에 가로막혀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시도도 하지 못한 채 그 안에 갇혀 좌절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신 삶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우리가 만들어 낸 아이덴티티를 깨고 나온다. 그 순간 그간 두렵게만 느껴지던 바깥세상은 더 이상 두려운 곳이 아닌 '자유로운' 곳이 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빅토리아가 찍어준 반 친구들과 나 :)
학생증ㅎㅎㅎㅎ
영어 선생님인 엄마도 포기한 내 문법인데... 평생 숙원 사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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