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한 말과 행동으로, 타인과 멀어지게 하는 악마의 속삭임
지금 생각하면 매우 유치하지만,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소소하게 다퉜던 일들이 있다.
짝꿍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 책상에 선을 그어 나의 영역과 상대의 영역으로 가른다. 선을 넘어오면, 넘어온 사람이 한 대 맞거나 그 물건을 상대가 가져도 된다는 규칙을 정한다. 심한 친구들을 보면, 선을 긋는 것만으로 부족했는지, 필통이나 각진 무언가를 이용해 담을 쌓거나 가방을 올려놓았다. 아예 얼굴도 쳐다보지 않겠다는 의지다. 선생님이 이 모습을 보고 중재를 해주시지만, 그것도 잠시, 쉬는 시간에 다시 올려놓았다. 희한한 건, 시간이 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웃으며 잘 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친구와 다퉜는데, 무엇 때문에 다퉜는지, 서로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남자끼리는 말로 다투다가 안 되면, 주먹싸움으로 번지기도 하지만, 여자와 다툴 때 다르다. 어린 나이에도, 여자를 때리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분이 풀리지 않는 것을 그대로 참아 넘길 순 없었는지, 소심하게 손바닥으로 여자의 어깨를 살짝 칠 때가 있다. 물론, 여자가 먼저 그렇게 칠 때도 있다. 그렇게 시작한 어깨 치기는, 탁구의 랠리처럼 주거니 받거니를 시작한다. 그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것을 멈추는 방법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한 명이 맞고 안 때리면 된다. 상대방이 때리지 않았는데, 때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납이 되지 않는다. 아픈 것은 아니지만, 맞고 때리지 않는 것은,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유치하게 생각했던 이런 일들이, 어른이 되었다고 사라졌을까?
형태만 달라졌을 뿐, 유치한 마음과 행동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사례는 뉴스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접하고 있다. 어떤 장면은, 같은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창피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초등학교에서 상식으로 배우는 행동에 역행하는 행동 때문이다. 아이들이 보고, 당연하다는 듯,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되묻지만, 단호하게 ‘맞아!’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말의 끝을 흐리게 된다. 책상에 선을 긋고 짝꿍과 어깨 때리기를 주고받는, 유치한 초등학생이 보기에도 당연한 것을 묻기 때문이다.
유치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네가 먼저’라는 생각 때문이다. 네가 먼저 선을 긋지 않으면, 네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네가 먼저 때리지 않으면, 이라는 생각이 유치함의 시작을 알린다. 물론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될 것에, 그렇게 하는 것이 문제다.
유치한 말과 행동의 본질적인 이유와 어떤 방법으로 이겨낼 수 있을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본 기도문이 있다. ‘주님의 기도’다.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유치한 말과 행동을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악의 유혹에 빠지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하면 상대도 해준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는, 악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네가 먼저 당했는데 왜 그래야 해?’라는 식으로 참지 못하게 부추긴다. 사람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존심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러지 않도록 한다. 그렇게 다투고 엉키게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그 유혹은 인지의 영역이 아니라, 본능의 영역이라 더 어렵다. 인지하기도 전에, 말과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말과 행동이 나온 순간, ‘아차!’ 하지만, 바로 부정하는 것 또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내뱉은 말과 행동에 부합하는 말과 행동을 이어가게 된다. 늪처럼 점점 더 헤어 나올 수 없게 빠져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