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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 Jun 09. 2021

추천에 흘러드는 덕진연못

杏仁의 길 담화_ 전주 덕진공원과 추천(鞦川) 

전주 덕진 연못에서 흘러나온 물은 추천(鞦川)에서 삼천, 전주천의 물과 합치며 만경강으로 나간다. 
추천(鞦川)은, 덕진과 팔복동 일대에 오래 살아온 이들 외에 대다수 전주 사람들에겐 생소한 천 이름이다.

전주천과 삼천이 합류하는 추천대(鞦川臺) 앞에서 소양천과 다시 합해지는 곳까지 송천동과 팔복동 사이를 흐르는 하천을 추천이라 이른다. 용산다리, 전주대교라 불리던 덕진과 팔복동 사이 팔달로를 잇는 다리 이름 추천대교도 바로 이 추천에서 비롯했다. 

추천대 앞은 전주천과 삼천이 만나는 합수지점이다.

추천(鞦川)! 이 명칭에는 추탄(楸灘) 이경동이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담겼다. 조선 성종 때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이경동은 귀향 후에 전주천과 삼천 물이 만나는 황방산 아래 이곳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며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후손 정호가 누정(樓亭)을 세워 추천대라 하고 그를 기렸으며, 뒤이은 후손들이 이 곳에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추천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렇다.

"가르내 일대는 전주 이 씨들이 집단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비록 생활은 어렵다 하더라도 화목하고 효성이 지극했다. 추탄의 부친 달성공(達誠公)이 중병으로 몇 달째 누워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위독한 사경을 당하게 되었다. 인근 비석날(현재 팔복동 버드랑주)에 거주하는 명의 소식을 듣고 선걸음에 달려가 동의보감에 의한 처방에 따라 명약첩을 받아 들고 급히 귀가하는데 때 마침 뇌성벽력을 치며 폭우가 쏟아져 내려 삽시간에 전주천은 범람했다. 추탄은 암담한 가운데 촌각을 다투는 부친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앞뒤를 가릴 것 없이 홍수가 넘쳐대는 전주천에 뛰어들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냐? 제방을 넘실대던 물살이 양쪽으로 좌악 갈라지면서 추탄이 걸어갈 길이 트이는 것이 아닌가. 이것저것 가릴 겨를이 없는 추탄은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와 숯불에 약을 정성스럽게 달여 시각을 다투는 부친의 입술을 적셔드리자 잠시 후 전신을 흥건히 적시는 땀을 흘린 부친은 숨을 급히 몰아쉬고 난 뒤 마침내 기사 회춘하여 완쾌되었다. 대홍수로 넘실대던 냇물은 추탄이 건너간 다음에 합쳐져 흐르게 되므로 그의 지극한 효성은 하늘도 도왔다는 인근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했을 뿐만 아니라 효행의 귀감이 되어 마을 주민들은 힘을 모아 나무다리를 놓기로 했다. 

오늘날 추천교의 자리가 된 나무다리를 놓았을 때  추탄(楸灘)의「추」자를 따서 다리 이름을 추천교(楸川橋)라고 했다. 냇물이 갈라진 윗마을을 상가리(웃가르내), 밑으로 갈라진 마을은 하가리(아랫가르내)라고 했다.(출처: 전주시 마을조사 “동심(洞心) 찾기” 덕진동 마을 조사서_재단법인 전주문화재단 간)

덕진동 일대 도로명 주소로 쓰고 있는 추탄로, 경동로, 하가로가 모두 이 이야기에서 따온 지명이다.


다시 덕진연못 이야기다.  3만 평에 이르는 연못이 깊고 넓어서 여름이면 연꽃이 장관을 이루고, 이 풍경을 일컬어 '덕진 채련(德津採蓮)'이라 해서 전주 8경의 하나로 꼽히던 명소다. 

덕진연못은 예부터 '단오 물맞이'로 유명했다. 단옷날이면 새벽부터 아낙네들이 모여들어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며 건강을 비는 물맞이 풍속을 이어, 해마다 전주 단오제가 열린다. 

연못을 끼고 총 4만 5천 평에 이르는 공원이 조성돼 있어서 시민들의 휴식처로도,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인기가 좋다. 전북대학교 교정과 기숙사가 공원에 맞붙어 있어서 이 대학 학생들에게는 덕진연못이 또 하나의 추억거리도 된다.  연못을 빙 돌아 산책하거나 연못에서 오리배를 타는 사람들, 공원 한쪽에 자리 잡고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1980년대, 90년대에는 공원 안에 개인이 운영한 야외수영장도 있었지만, 불미스러운 사고 이후 폐쇄됐다. 


덕진연못은 덕진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기도 하고, 덕진동이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비롯했다.

후백제 견훤이 땅을 파고 물을 끌어와 연못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도선국사가 축조했다고도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역사적 근거는 찾아볼 수 없고, 언제부터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고려 때에도 연못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고려시대에 전주 고을 사람들이 4월 초파일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것이 전주 용왕제의 시초였고, 덕진 못을 용궁 속의 용왕 처소로 인식하여 용궁각을 짓고 용왕제를 지냈다고 한다.  덕암마을에 전해져 오는 얘기로는 용화 부인이 덕진연못에서 나온 미륵상을 용궁각(천문각)에 모셨다고 하며, 덕진연못의 용왕이 말하는 것을 받아서 글로 쓰고 범문을 하였다고 한다." (전주 덕진연못의 역사와 민속- 『전주학 연구 제4집』, 전주역사박물관.) 

용왕제를 지낸 전통과 관련해, 백여 년 전에는 덕진연못을 근거지로 용왕을 섬기는 "용화은혜수덕창해수교"라는 종교도 있었다. 지금 공원 옆에 있는 밥집 ‘옛날옴팡집’ 자리에, 과거에는 일명 ‘용화 할머니’라고 불리는 교주를 따르는 신도들이 차린 법당이 있었다고 한다. 


덕진연못에 둑을 쌓은 것은 조선 정조 때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다. 전주의 지기가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가련산부터 건지산을 이어 큰 둑을 쌓았다고 한다. 

"德津池 在府北十里 府之地勢 乾維空缺 氣脈洩焉 故西自可連山 東屬乾止山 築大堤以止之 名德津 周九千七十三尺.  덕진연못은 전주부 북쪽 10리쯤에 있다. 그런데 전주부의 지세가 건(乾)이 공허하여 기맥(氣脈)이 흘러나간다. 이런 까닭에 도성 서쪽에 있는 가련산에서부터 동쪽에 있는 건지산을 이어 큰 둑을 쌓아 완성하였다. 이를 덕진(德津)이라 불렀다. 연못의 둘레는 9703척이다. (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승람)"


덕진연못을 오늘날처럼 공원으로 만든 시작은,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 박기순이었다. 한일 강제병합과 동시에 여산 군수를 지낸 대지주 박기순(朴基順)은, 1917년 7월부터 30년간 국유임야 임대 허가를 받아 사설공원을 설치했다. 그는 자신의 회갑을 기념해 취향정(醉香亭)을 세우고, 스스로 지은 시(詩)의 편액을 정자에 걸었으며 취향정기(醉香亭記) 비석을 세워 자랑삼았다. 이후 1929년 조선총독부가 철도를 이설하고 덕진역을 세운 뒤로 1938년 5월 공립 공원으로 바꿨으며, 1978년에는 전주시가 시민공원 결정고시에 의거, 도시공원으로 조성했다. 
 연못 둑길은 7년 전만 해도 차량이 다니는 도로였으나 
2014년 들어 보행자 전용 구간으로 만들면서 더 이상 차량 통행은 할 수 없게 된  대신, 이팝나무와 버드나무 아래 나무의자가 있는 아름다운 산책로가 됐다.


이런 역사를 보여주듯 덕진공원 안에는 박기순이 세운 취향정과, 친일시인 김해강 시비가 친일잔재로 남아 있어, 그 친일의 죄상을 밝히는 작업도 진행됐다.  

지난 2005년에는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전북시민연대>가 취향정 앞에 그 역사를 낱낱이 적은 안내판을 세워놓았고, 작년에는 전주시와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광복회 전북지부가 김해강 시비  옆에 친일행적이 담긴 단죄비를 세웠다. 

친일 잔재 말고도 공원 안에서는 여러 인물들을 마주할 수 있다. 연화문 안쪽에는 전주 출신 유학자 전우를 기리는 간재 전 선생 유허비(艮齋田先生遺墟碑)가 거북등 위에 서 있고, 더 나아가면 둥근 갈래길 주변에 감꽃 시인 이철균, 백양촌 신근, 신석정, 친일 시인 김해강까지 시인 4명의 시비가 있다.

그 오른쪽 길에는 김개남 장군을 기리는 기념석과 전봉준 장군 입상이 서 있고, 더 걷다 보면 독립운동가 김일두, 제7대 국회의원 김용진 기념비에 이어, 취향정과 풍월정 사이에 김병로, 김홍섭, 최대교 등 청백리 법조인 3명의 행적을 기리는 법조 삼성상도 있다.

덕진공원 연못 한가운데에 연화정도서관이 있다.

연못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여러 역사를 간직한 덕진 공원은, 연못을 가로질러 나 있던 연화교의 철제 현수교를 40년 만에 없애고 석교로 바뀌었고 연못 가운데 연화정도 새로 지어 한옥 도서관으로 탄생했다. 흔들리는 현수교를 조심조심 걷던 옛 추억은 사라졌지만, 이제 튼튼한 돌다리 위를 휠체어도 유모차도 편하게 건널 수 있다. 

공원 안 매점은 진즉 전주시민갤러리로 변신해 시민들의 예술공간이 되었고, 수변무대와 정자, 나무데크 길을 따라 연못을 한 바퀴 돌다 보면, 공원 곳곳에서 전주의 정취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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