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렌틴 세로프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
[역사와 명화] 23, 러일전쟁과 니콜라이 2세 (1904)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요동반도를 할양받았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3국간섭으로 이를 다시 돌려주었는데, 러시아는 이를 계기로 여순과 대련의 25년간 조차권을 확보하여 만주를 자신들의 세력권하에 두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을미사변 이후 4개월만에 고종은 아관파천을 성공시켜 친러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던 중 1900년 청나라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이 만주로 번지게 되면서, 러시아는 자신들의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만주를 무력 점령하였다. 러시아는 더 나아가 압록강 유역으로 군대를 이동시킨 뒤 압록강 삼림채벌권을 내세워 조선에 대해서도 야욕을 노골화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행동은 혁명이 우려되던 자국내의 위기를 대외 문제로 희석시키려 했던 차르 니콜라스 2세의 계략도 한 몫 했다. 러시아 로마노프왕조의 마지막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1968~1918)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이자 독일 제국 빌헬름 2세의 이종사촌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견제를 하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했던 영국과 ‘제1차 영일동맹’을 맺고 미국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만주는 물론 조선도 러시아의 손에 넘어갈 것을 우려한 일본은 1904년 2월 8일 여순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러일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9일에는 인천 앞바다에 있던 두 척의 러시아 군함을 격침시키고, 다음날인 10일에야 정식 선전포고를 하였다. 일본의 선제공격에 놀란 것은 러시아만이 아니었다. 조선에서도 재빨리 ‘국외중립’을 선언했으나 일본은 무시하고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의 세력권에 넣어버리며 독도를 무단으로 점령했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으로부터는 네 차례에 걸쳐 4억1천만달러 규모의 엄청난 차관을 지원 받았다.
러시아는 당시 300만의 군대를 거느린 군사강국이었으나 대부분의 병력이 유럽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병력으로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해군기지가 있는 여순에서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29Km에 이르는 철옹성같은 콩크리트 기관총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래서 노기 대장이 이끄는 일본군 제3군 4개사단은 수개월간 총 세차례의 총공세를 펼쳤으나 패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오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 4차 총공세에서 여순항이 내려다 보이는 203고지를 빼앗으면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일본군은 최대 15만명을 투입하여 5만7천여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러시아도 5만여명 중 1만6천명이 전사하였으며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한편 러시아의 발트해에 있던 발틱함대는 수에즈운하를 운영하던 영국의 방해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돌아 우여곡절 끝에 28,000Km를 8개월만에 돌아 조선 앞바다에 도착했으나 이미 여순항이 일본에 넘어간 상황이었다. 그들은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여순항도 이미 함락된 상황이었기에 전투는 포기하고 조용히 블라디보스톡으로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진해에 진치고 있던 도고 제독의 일본연합함대에 발견되어 이른바 쓰시마 해전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전투로 러시아 최강 함대였던 발틱함대는 총 37척중 19척이 격침되고 7척이 나포되는 대패를 당하였다.
이후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맺으며 러일전쟁은 종결된다. 주변국들의 예상을 뒤엎으며,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확실한 맹주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05년 일본은 미국과 “미국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한다”는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었고, 영국과는 ‘제2차 영일동맹’을 맺으며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이후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조선이 독립국이 아닌 ‘보호국’으로 격하시키며 사실상의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 러일전쟁은 만주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힘겨루기였지만, 그 배후에는 서양 열강들의 지원과 동맹이 얽히면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세력구도의 형성을 촉진하게 된다. 그리고 패전국 러시아는 니콜라이 2세의 무능을 보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된다.
<니콜라이 2세의 초상>을 그린 화가 발렌틴 세로프는 러시아의 인상주의 화가이며 당대의 최고의 초상화가로 인정을 받으며 황제와 귀족들은 물론 예술가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인물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눈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얼굴 뒤에 감추어진 나약함과 욕망, 혹은 잔혹함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고 한다.
++ 발렌틴 세로프 (Valentin Serov, 1865~1911)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 (Portrait of His Imperial Majesty Nicolai II Alexandrvitch, Tsar of All the Russias)>, (1902), oil on canvas, Scottish National Gallery, Edinburgh
** 러일전쟁 여순전투의 치열한 공방전을 담고 있는 일본 영화 ‘203고지’ (1980)
https://www.youtube.com/watch?v=F1aU6nbAI5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