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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섬 정은영 Jul 06. 2024

장마철의 앨리스

정은영 詩



  클린하우스 스티로폼 수거장 난간에 산뜻한 주황 암탉 한 마리가 고고히 서 있다. 믿기지 않아 우산을 고쳐 들고 두 눈을 비벼봤다. 반려견이 그 앞으로 쫓아가자 푸드덕 날갯짓만 하더니, 내가 다가서자 재빨리 날개를 펼치고 클린하우스 뒤편 깊은 계곡을 향해 점프했다. 얼른 하천 반대편으로 따라가 보니 장맛비로 물이 불어난 드넓은 하천을 건너 어느 정원의 높은 담벼락에 도달해 탐색 중인 녀석의 바쁜 머리가 보였다.

 


  비 그친 오후에 암탉을 찾아본다. 다리 근처엔 누가 부는지 비눗방울들 날리는데 암탉은 없다. 제발 무사해라, 무사해라 제발. 근처 초등학교를 한 바퀴 돌아오는 길. 보도블록 위로 은밀한 수화처럼, 말없이 날고 있는 두 마리 새처럼, 초록페인트 흔적 두 줄이 가느다란 곡선을 이루며 날 따라와, 말을 건다. 어느 날 페인트통을 들고 걸어간 이는 결코 알 수 없었을: 처음 사랑에 빠진 어린 연인처럼: 소리 없는 모스 부호처럼: 서로 다른 두 파트의 돌림 노래를 따라 하듯 초록 마음으로 따라가다 불쑥 열린 대문 안마당으로 흔적은 나를 남기고 저들끼리 들어가 버린다.

 


 혼자 걸을 때 나와 동행하는 상상은 이런 것: 어제 나는 거울 앞의 내가 발레 하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보았다. 발레리나처럼 움직인 줄 알았는데 기기에 촬영된 것은 처음 본 낯선 여자가 퀭한 표정으로 팔과 다리를 힘없이 흔들어대는: 발레리나의 동작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중력을 버티고 버티느라 혼이 빠진: 사랑스럽다거나 보기 좋다고 할 수 없는: 나라면 결코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은 나이 든 여자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저 여자를 너도 잘 알고 지냈단 거지? 내 주위의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지금껏 나만은 알지 못했던 낯선 육체의 존재를 이제야 발견했단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는 왼팔을 뻗고 오른 다리를 든 채 나와 산책한다. 앙바-아나방-앙오-데벨로페-에-에-에-에---뻣뻣한 오른 다리를 반복해서 들어 올리고 버티느라 식은땀을 흘린다. 그의 어깨 위엔 날갯짓을 멈춘 암탉이 졸고 있다.

 


 남의 정원에 앉아 두 손으로 잘 마른 캐모마일 씨앗을 훑는다. 이걸 키워서 따순 차를 만들려고. 쭈그리고 앉은 동안 암탉도, 비눗방울도, 초록 비밀 대화도, 낯선 발레리나도 사라진다. 나를 둘러싼 배경은 매번 꼬릴 흔들며 반기는 반려견처럼 다정하기도 한데 왜 나만, 내 시만은 이토록 시답잖은지를: 장맛비가 멎은 저녁 하늘의 토막 난 무지개처럼: 오직 한 벌 뿐인 무겁고 눅진한 검정 장화처럼: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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