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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달아나다

by 꼬르륵

"카톡"


"미나, 안녕. 지난번 토론대회 준수한테 물어봤어?"


아침 일찍 일어난 미나의 핸드폰에 누군가의 톡이 떴다. 해나였다. 곽해나. 공부도 잘하고, 예쁘기까지 한 해나가 요즘 부쩍 미나에게 친절했다. 사실 며칠 전 채린이가 요즘은 왜 자기랑 안 노냐고 했던 이유도 해나 때문이었다. 해나는 요즘 미나에게 같이 토론 대회를 나가자, 독서 모임을 하자, 계속해서 같이 뭔가를 하자고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해나가 준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준수 공부 잘하더라", "준수 발표 잘하더라" 정도였는데, 어느새 "준수가 좋아하는 과목이 뭐야?", "준수는 주말에 뭐 해?" 같은 질문들로 바뀌어 있었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하교 길에 미나를 기다린 듯 해나가 미나의 반 앞에 서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일이었다. 천하의 해나가 미나를 기다리다니...


해나는 잠시 할 말이 있다며 교실을 나서는 미나에게 말했다.

"미나야, 이번에 서울시에서 전국 중학생 토론대회가 열리는데 너도 나랑 같이 나가는 게 어때?"

"내가?"

"응. 너도 나간다고 하면 선생님도 알았다고 하실 거야."

"..."

"그리고 토론 대회라서 인원이 더 필요한데 준수도 같이 해보면 어떨까?" 해나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준수 이름을 말할 때마다 그랬다.

"준수? 어어.... 준수는 당연히 잘할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 준수 진짜 똑똑하고... 뭐든 잘할 것 같아."

해나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얼른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준수랑 친하잖아. 준수한테 물어봐 주면 안 될까?"

해나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미나는 미나가 나가는 건 자신이 없었지만 준수라면 충분히 나갈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준수에게는 말을 해주고, 미나는 빠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어... 준수한테는 말을 해볼게. 근데 나는..."

"역시! 그렇게 해줄 줄 알았어. 미나 너 진짜 최고다. 그렇게 하면 우리 팀이 상을 받을 수밖에 없을 걸. 그럼 준수랑 이야기해 보고 나한테도 말해 줘. 고마워. 나 이제 갈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나가 손을 흔들며 뛰어나갔다. 해나가 달려 나간 방향에는 반짝거리는 검은색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해나를 태우고 가는 차였다.


하지만 그 뒤로 미나는 준수에게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미나는 어제부터 오로지 그 공책 생각뿐이었다. 그 공책에 언제 최수빈을 다시 깨워 달라고 쓸지, 이제는 그 공책이 도대체 어디 있는 건지.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정지소였다. 어제 담임 선생님이 찾는다며 교무실로 보냈던 것도, 돌아온 미나와 눈이 마주친 것도 이상했다. 미나는 오늘 지소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미나는 카톡에 "미안.... 아직"이라고 써서 보내려다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은 그것보다 빨리 노트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방에서 나서는 미나를 보고 부엌에서 밥을 하던 엄마가 불렀다.

"미나, 밥 먹고 가야지. 왜 이렇게 일찍 가?"

"시간이 없어. 엄마. 나 오늘 일찍 가야 돼."

"그래? 근데 너..."

엄마가 잠시 멈칫하더니 미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너 요즘 왜 채린이랑 안 다니니?"

역시나 엄마는 눈치가 빨랐다.

"그냥 내가 요즘 좀 바빠."

"왜 바쁜데?"

하아. 미나는 여기서 더 엄마와 말을 섞다가는 오늘 일찍 학교에 가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엄마의 말을 멈추게 해야 했다. 엄마가 뭐라고 하지 않을 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아니, 내가 토론대회를 나가야 돼서 준비하느라 학교에 일찍 가고 늦게 오고 그래서 그래."

"토론대회?"

엄마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았다.

"그래? 학교 대표로 나가는 거야? 학교에서 하는 거야?"

"학교 대표로."

미나는 얼른 나가고 싶었다.

"그랬구나. 알겠어. 엄마가 빨리 삶은 계란이라도 해줄까?"

"아니 아니, 늦었다니까."

"그래그래 알았어. 얼른 가 봐."

역시나 엄마는 미나를 더 붙잡지 않았다.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미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지소는 좀 일찍 학교에 오는 편이었다. 지소만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은 교문 어귀에서 지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였다.

아직 이른 시간, 아이들이 드문드문 들어가는 교문 어귀에서 미나는 서성였다. 그리고 멀리서 교문을 향해 걸어오는 정지소가 보였다. 미나는 외쳤다.

"지소야!"

귀에 무언가를 꽂고 있던 지소가 놀란 얼굴로 미나를 바라봤다.

"어.... 어."

미나는 지소에게 굳이 말을 걸진 않는 아이였다. 예전에 괴롭힘을 당한 이후로.

"안녕. 나 물어볼 게 있는데 잠깐만."

지소는 미나의 말에 이어폰을 뺐다.

"뭔데?"

미나는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떼기 시작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미나는 차라리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게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리소설 같은 데 보면 범인들은 직설적인 물음에 흔들리곤 했다.

"있잖아. 너 혹시 내 노트 가져갔어?"

지소가 놀란 듯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미나를 바라봤다.

"뭐? 내가? 왜?"

미나는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지소의 얼굴을 관찰했다. 정말 아니어서 놀란 건지, 아니면 미나가 알아챈 것에 놀란 건지 알 순 없었다.

"그거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노트야. 가지고 있으면 빨리 줬으면 좋겠어."

미나는 절박했다. 그 안에 미나가 적은 내용들을 누군가 보는 것도 꺼림칙했다. 하지만 정지소의 태도는 여전했다. 하얀 얼굴의 정지소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나는 네 노트 가져간 적이 없어. 네 노트를 왜 나한테 찾아?"

"근데 너 어제 왜 담임이 나를 찾는다고 가 보라고 했어. 담임은 나 봐도 아무 말도 없던데."

"아니야. 분명히 담임이 나보고 너 보면 교무실로 오라고 하라고 했다고."

"그걸 왜 너한테 담임이?"

"내가 담임 옆에 지나가고 있어서 그랬나 보지. 나도 모른다고!!!"

정지소가 소리쳤다. 미나는 정지소를 바라보며 진짜 아닌가 싶다가도 연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가 네 가방 한번 봐도 돼?"

예전의 미나라면 도저히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노트는 미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네가 왜 내 가방을 보는데?"

"아니라며. 그럼 보여주면 되잖아."

미나가 지소의 가방을 잡았다. 그러자 정지소가 가방을 움켜쥐고 미나를 밀쳤다.

"그만해!"

"아니면 그냥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니야?! 왜 못 보여주는데?!"

미나와 지소의 목소리가 커지자 주변 사람들까지 둘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지소가 다시 한번 거칠게 미나를 밀치자 이번에는 미나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몸이 기울었다. 그때였다. 넘어질 때까지 가방을 놓지 않았던 미나의 손에 지소의 가방이 기울고 지퍼가 열리면서 가방 안에 있는 물건들이 후드득 쏟아졌다.


지소의 책과 노트, 필통, 그리고 생리대.


지소의 얼굴이 당황해 빨개졌다. 거기엔 미나의 노트가 없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미나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누군가 미나를 등지고 떨어진 물건들을 재빨리 가방 안에 집어넣더니 지소에게 건넸다. 뒷모습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당황한 아이들 사이에서 유독 침착하게, 마치 어른처럼 차분하게 움직이는 준수였다. 지소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가방을 받은 후 교문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달려가는 지소를 뒤로 준수가 미나를 돌아봤다.

"괜찮아?"

미나 역시 창피하긴 마찬가지였다.

"어.... 어."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지. 조금 전까지 이성을 잃고 몸싸움까지 벌이는 모습을 준수가 봤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미나는 준수를 똑바로 보기 어려웠다. 미나는 조금 전 다툼뿐 아니라 최수빈을 혼수상태에 빠지게 한 일, 거짓으로 전교 1등을 했던 일, 달라진 외모를 즐기며 준수의 호감을 내심 좋아했던 일까지, 다 들킨 기분이었다. 미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물은 계속 차올랐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는 게 힘들었다.

미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지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미나야, 잠깐만!"

뒤에서 준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미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더 빨리, 더 멀리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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