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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Jan 11. 2024

진심 어린 체험을 하고 계십니까

아침 운동길, 샛강의 오리들을 보며 새삼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걸을 수도, 헤엄칠 수도, 날 수도 있다. 수륙양용 항공기가 착륙하듯 멋지게 물살을 가르며  물 위에 착지하는 모습, 자유자재로 잠수하여 물속 먹잇감을 찾는 모습, 걷는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물가로 나와 호젓하게 걸어 다니며 노는 모습. 하지만 오리는 자신의 이 각별한 능력에 대하여 감사함이나 인지가 없을 것이다. 그저 본능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오는 동작들이기 때문에, 날 수 없고 수영도 배워야 할 수 있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부러워한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갈퀴가 찢어져 헤엄치지 못하거나 날개를 다쳐 날지 못하는 동료를 봐도 자신의 멀쩡함을 감사할 줄 모를 것이다. 


라이더를 하면서 픽업을 하러 치킨집에 가보면 사람이 치킨을 튀기는지 치킨이 사람을 튀기는지 생닭과 기름과 사람이 혼연일체가 아닌 혼연범벅이 되어서 끊임없이 치킨을 찍어내는 씁쓸한 자본주의의 현장을 본다. 집에 편히 앉아서 치킨을 주문하는 고객과 그걸 배달하는 배달원도 그 치킨 지옥의 일원이다. 나는 어릴 때 닭을 키워봐서 닭이 어떻게 사육되는지 안다. EBS 다큐 같은 걸 보신 분들은 대충 아실 것이다. 공장식으로 사육된 닭들이 가공공장에서 도살 후 1차 가공 처리되고, 그것이 또 여러 경로를 거쳐 치킨 프랜차이즈로 보내진다. 이렇게 튀겨지는 닭들에 진심이 들어설 자리가 있을까. 진심으로 (열심히) 치킨집을 운영하는 사장님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원론적으로) 삶의 진심, 진심 어린 체험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의미이다.


대도시의 음식점들은 (내 입에는) 대체로 맛이 없다. 지방에 비하면 비싸고 음식도 성의가 없는데 사람들은 잘도 사 먹는다. 아마 그런 문화, 그런 인심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 같다. 지방의 노포집처럼 진심이 들어간 맛이 아니라 프랜차이즈 매뉴얼에 따라 비주얼만 그럴듯하게 나오는 메뉴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의 수고를 덜기 위해서 그런 곳에서 대충 한 끼 때운다.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면에서 나는 삶은 체험과 그 체험에 대한 기억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 체험과 기억을 기록(글, 그림, 사진, 음악 등 예술과 기타 다양한 방법으로)으로 남겨서 우리와 비슷하게 고단한 삶을 살 후세에게 위안과 감동을 준다면 그것이 또 하나의 삶의 의미일 것이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튀겨지는 치킨처럼 우리의 일상이 피상적이고 수동적이라면 우리는 오리가 물 위에 착지하거나 잠수하거나 뒤뚱뒤뚱 걸을 때 느끼는 그 진심 어린 체험의 쾌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건 살아있다는 느낌, 그것이다. 자본주의의 논리에만 충실히 따르면 우리는 어느새 피상적인 일상의 유리상자에 갇힌다. 별 대단한 곳에 가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기뻐하고 행복해했던 엄마와의, 처형과의 여행을 떠올려보면 - 난 동생을 그다지 호강시켜주지 못하는 제부이지만 이런 이유로 처형은 나와 친하다 - 진심 어린 체험이 어떤 것인지 조금 감이 온다.


지금껏 제법 많은 곳을 돌아다닌 아내와의 여행지를 떠올려봐도 남들이 말하는 명소보다는 우리 두 사람의 체험이, 감각이 진심이었던 장소, 그날들의 기억이 더 선명하게 남아있다. 별 볼 것 없는 실개천 가였음에도 쏟아지는 햇살과 온화한 날씨가 너무나 평화로웠던 곳, 이슬에 젖었던 휴양림 뒷길을 온갖 신기한 버섯들을 구경하며 다리가 뻐근하게 걸었던 기억...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에게는 연로한 어머니와 살아생전에 얼마나 진심 어린 체험을 함께 나눌 수 있을지가 숙제로 남아 있다. 장성한 자식들이 일 년에 서너 번 부모를 보러 온다고 봤을 때, 죽을 때까지 200번을 넘지 않을 자식들과의 만남을 얼마나 진심 어리게 만들지도 역시 숙제다.


일생의 반려자인 아내와도 아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여행을 얼마나 진심으로 함께 할 수 있을지,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책의 세계에서 얼마나 진심으로 인간과 소통할 수 있을지도 숙제다. 결국 음악과 책의 세계에 숨어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진심은 언제나 감동을 준다. 언젠가는 감동을 준다. 내 진심으로 남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감동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살맛이 난다. 삶에 오리의 날아오름이나 착지 같은 쾌감이 있다. 단 한 시간이라도 진심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본다. 어설픈 구성의 글이나마 진심으로 써본다. 부족한 실력이나마 진심으로 노래를 만들어 본다. 오늘 내가 회사에 출근하는 것도 현재는 원치 않는 일일망정 진심으로 가족과 함께 먹고살기 위한 일이니 이 또한 진심으로 임해 본다.


진심 어린 체험이 없는 삶에는 재능이 설 자리가 없다. 재능은 나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일이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당신도, 나도 안다. 그래서 더욱 삶을 진심으로 체험하며 살아야 한다. 무미건조한 삶은 곧 스스로 시간을 죽이는 삶이다. 살아서 내게 오는 시간을 내가 스스로 죽이는 것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이 위선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데 술을 진땅 마시든, 진지하게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든, 친구들과 수다를 떨든, 사과나무를 심든 잘잘못을 논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나의 개인적인 살아있는(살아있다는 느낌의) 체험이다. 사과나무를 심는 것이 그 사람의 진심 어린 체험이라면 그건 그 사람에게 매우 의미 있는 체험 아닐까.


나는 은퇴하게 되면 - 언제일까? ㅎㅎ - 아끼는 사람들에게 진심이 담긴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 그건 당신들을 향한 내 마음이 진심이라는 이 감각과 체험을 요리를 통해 그들과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만들고 맛보고, 그들은 내가 만든 것을 맛보며 그 사랑을 체험하고 싶다.


재능의 기나긴 여정 속에서 하루하루 진심 어린 체험을 해 보자. 애완견과 진심으로 눈을 맞추고 거실에서 혼잣말처럼 하는 아내의 한마디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보자. 우리는 오리와 달리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릴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할 줄 안다. 그래서 진심 어린 체험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만 느낄 수 있고, 타인과 나눌 수 있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다면 더 이상 이런 체험을 하기는 힘들어진다.


공연장에서 온몸을 흔들면 피아노와 함께 연주하는(연주되는) 피아니스트, 드럼 스틱과 팔 - 어깨 - 상체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연주하는 드러머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은 그 순간에 정말 삶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삶을 감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을 즐기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 악기 앞에 진심으로 섰을까.




살아있지만 어쩌면 잠든 척하는 현실의 삶, 이것을 깨우는 것이 진심 어린 체험이다. 진심으로 체험하려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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