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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Jan 15. 2024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타인의 이야기

브런치에 부지런히 글을 쓰다 보니 작가님 세 분이 댓글로 새해 인사를 남겨주셨다. "복을 많이 받으라"고 축복하는 것은, 복을 '우주 가운데 좋은 기운'이라 정의한다면 기운을 그 사람에게 몰아주는 격이다.  물론 '울지마 톤즈'의 고 이태석 신부처럼 좋은 일을 엄청나게 하고도 세상을 일찍 떠난 분도 많다. 호의호식하며 장수하는 것만을 복이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죽어서도 많은 사람의 삶에 귀감이 되는 고 이태석 신부나 아름다운 곡을 남기고 떠난 작곡가 고 이영훈 선생처럼 속세의 복을 초월하여 뭔가를 남긴 귀한 삶도 많다.


막내아들은 수년 전 자신의 영업 능력을 믿고 과감한(무모한) 투자를 한 결과 지금 상당한 빚의 압박 속에 생활하고 있다. 우리 부부가 힘닿는 데까지 경제적으로 지원하긴 했지만, 그걸로 턱없이 부족하고 여전히 짐을 지고 가야 할 당사자는 아들 자신이다.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어제 내 생일 겸 가족모임에도 막내는 오지 못했다. 하루라도 벌이가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아들은 최근 악화된 상황의 압박에 멘탈이 나가 두 달 동안 칩거한 적도 있다. 다행히 지금은 부지런히 생업 전선을 달리고 있다. '성인이고 네가 저지른 일이니 알아서 해라'고 외면해 버리면 내게는 번잡스러움이 줄어들겠지만 당사자인 아들은 의지할 데가 없어서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경제적인 것보다 더 정신적으로 힘과 위안을 줄 누군가가 아들에겐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막내아들뿐만 아니라 어떤 인생에게도 사연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찾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 이야기가 들리지 않고, 그들의 고통받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행복을 로또 당첨, 소비의 만족, 혼자만의 영광으로 생각한다면 행복이란 관문은 매우 좁은 모양새다. 그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안절부절하고, 계산하고, 눈치 보며,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기를 써야 할 것 같다.


과거의 내가 이랬다. 시간은 너무 빨리 흘러가는데, 나는 빨리 성공해야 하는데, 보란 듯이 남들 앞에 '당당'이 아닌 '떵떵'거려야 하는데... 이런 생각들에 떠밀리듯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은 도가 통했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성공하고 싶고, 잘되고 싶지만 이제는 남을 돌아볼 여유가 조금 생겼다. 그건 내가 경제적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게 아니라 고통을 당해봤기 때문이다. 나 또한 2년간 준비한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고, 사업에 망하고,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날려 먹으면서 실패한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생긴 것이다. 부동산 사기를 당해 10억 넘게 날려먹고 우울증으로 앓아누운 친척 누나, 막내아들, 삶의 온갖 장애 앞에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다.


내가 앓고 있는 위장병의 존재를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모르듯이 타인의 고통과 사연은 찾아보지 않으면, 관심 있게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타자가 빠진 자아는 온전할 수 없다. 아니 존재할 수 없다. 하늘도, 바람도, 돌도, 나무도 없고 가족도, 친구도, 아니 사람도 없다면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고, 느낌이란 걸 가질 수 있을까? 우린 사실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다. 나는 남을 구성하고, 남은 나를 구성한다.


부귀영화를 누린 후에 안치할 곳이 없어서 2년째 자택에 안치 중인 OOO의 유해처럼 그런 마지막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고통을 안 당하고, 손해를 안 보고, 항상 기쁘고 즐겁기 위해서 타인의 신음과 일그러진 표정을 외면하면서 좁은 행복의 관문과 그 주변 풍경을 떠돌고 있지는 않은가.


조금 고통을 당해도 괜찮다. 조금 수고스러워도 괜찮다. 우리가 함께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우리가 함께 살아있음이 될 수 있다면. 재능도 결국엔 이러한 소통의 도구다. 슬픈 그 사람을 마음껏 울게 하고, 불안한 그 사람을 실컷 웃게 할 수 있는 재능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우리 부부의 노후가 조금 불안해도 당연히 우리는 막내와 함께 행복한 것이 더 좋다. 막내를 외면하고 돈을 악착같이 모아서 우리끼리 부귀영화를 누린들 그게 행복할까. 음악을 하는, 곡을 만드는 나는 사람들의 그 감정을 건드리고 싶다. 울고 싶은 사람을 울게 해주고 싶다. 열린 음악회나 불후의 명곡 같은 프로그램에서 가끔 카메라가 관중석을 비추면 이유 없이, 소리 없이 우는 청중들이 있다. 물론 이유가 없지 않을 것이다. 진심을 다해 속에서부터 노래를 끌어올려서 관객들의 울음을 터뜨리고야 마는, 그들의 삶을 어루만져 주는 가수들을 나는 존경한다. 그것이 바로 재능이다. 




그들의 고통이, 기쁨이, 눈물이, 이야기가 무엇인지 찾아보자. 조금만 더 허리를 구부리고, 눈을 가까이 대고 들여다보자. 그곳이 바로 당신이 가진 재능이라는 마법의 약을 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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