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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Jan 23. 2024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모든 죽어가는 것'은 생명이다. 왜 윤동주는 생명을 모든 죽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했을까? 내가 만약 어린아이나 파릇파릇한 청춘들에게 '죽어가는 것들'이라고 말한다면 아마 모욕죄로 고소를 당할지도 모른다. 살아있되 싱싱하고 활기가 넘치고 예쁜 것들도 사실 모두 죽어가는 것들이지만 현실에선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죽음과 가까운 것들만 죽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요양병원 침상에 누워서 거동을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 같은 노인 환자들, 저승꽃이라 불리는 검버섯 가득한 얼굴, 온몸과 마음으로 고통을 겪어내는 암 환자들의 지친 표정, 쩍쩍 갈라진 노목의 껍데기...


죽어가는 것은 외부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내면에도 있다. 어릴 적 꿈이 죽어가고, 좋아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이 죽어가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죽어가고, 순수했던 짝꿍과의 사랑이 죽어간다. 그리고 재능에 대한 믿음도 죽어간다. '도대체 내가 잘하는 게 있기나 한 건지. 세상에는 능력자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죽어가는 것'에 대한 역설은 죽어간다는 것은 아직 생명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팬심이 날개를 달아 훨훨 날아오르고 있는 임영웅에 비하면 골방에서 피아노 연습하고 있는 나의 음악은 어쩌면 죽어가는 것 같다. 모든 의미와 이유가 퇴색할 대로 퇴색하고 오로지 피아노를 터치하는 느낌과 피아노가 내는 소리와 내 감각과 정신만이 살아있다(죽어간다). 그래서 생각이 났다 보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많은 돈, 젊고 예쁜 육체, 좋은 집과 고급 차로 대변되는 소비와 쾌락의 행복을 추구하던 시절에는 '죽어가는 것'의 소중함을 몰랐었다. '죽어가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소중한 사실을. 내 속에 죽어가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끄집어 낼 필요도 없었고, 상처 입은 영혼을 꺼내 가족과 화해를 시도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내 속의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 주고 싶다. 그 사랑은 어쩌면 처연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할 것이다. 노인네의 사랑이 어찌 젊은이의 불타는 사랑과 같을까. 노인네의 사랑은 젊은이의 불타는 열정은 없지만, 아픔을 공감하는 깊은 배려가 있고 삶의 애환을 토닥거리는 공감이 있다.


내가 애정하는 내 내면의 것들, 그 사소하고도 소중한 것들을 왜 사랑하면 안 된단 말인가. 지금 빛나고 있는 사람들도 결국 어둠 속에서 그 사소하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한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인적 없는 해변에서 수없이 버스킹을 했던 시절의 임영웅처럼. 임영웅처럼 되기 위해서 인적 없는 해변에서 수없이 버스킹을 해야 하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기를.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생명의 환희를 실감할 수 있을까. 예수의 부활이 찬란했던 것은 그가 먼저 죽었기 때문이다. 나의 수명이, 시간이, 재능이 죽어가고 있다. 슬퍼할 일인가? 슬퍼하기만 하고 있을 일인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윤동주의 말은 비장하기보다는 너무 따뜻한 말이 아닐까. 


흘러넘치는 것이 꼭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고음이 늘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암에 걸려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불렀지만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는 들을 때마다 코끝을 찡하게 한다. 가수 소향의 세바시 강연 제목은 <8번의 폐렴 끝에 부르게 된 진짜 노래>이다.


나의 죽어가는 것들은 무엇일까. 조용히 생각해 보자. 나의 죽어가는 것들과 커피 한잔하며 맑은 하늘 올려다보고, 잔잔한 바람 쐬면서 눈을 맞춰보자.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보자. 죽어가기 때문에, 유한하기 때문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들. 당신은 이 죽어가는 것들을 외면하고 어디에서, 다른 사막에서 허황된 오아시스를 찾고 있는 건 아닌가.


나이가 많고, 머리가 안 돌아가고, 손가락이 굳고, 몸이 뻣뻣하고, 돈과 시간이 없는... 이렇게 죽어가는 당신의 것들을 사랑해 볼 생각이 없는가. 초라한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면 어찌 초라한 이웃에 대해 진심을 가질 수 있을까. 말라비틀어진 밥도 물을 공급해서 잘 끓이면 맛있는 누룽지가 된다. 부모도, 세월도, 환경도, 재능도 원망하지 말고 죽어가는 당신의 것들을 사랑해 보라. 진심으로. 그러면 꽃이 필 것이다. 모든 꽃은 죽어가는 가운데 핀다. 그 과정이 곧 우리 삶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사소한 글을 쓰고, 사소한 피아노 연습을 하며, 사소한 곡을 만든다. 모든 죽어가는 것은 삶의 이면이다. 화려한 무대는 삶의 표면이다. 싱싱한 밥은 곧 상해 가는 밥이다. 밥은 냉장고에 넣어둘 수 있지만, 재능의 냉장고는 없다. 우리 삶은 언제나 리얼타임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죽어가는 내가 사랑하는 것. 이것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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