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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Aug 23. 2023

<코스모스>를 다시 읽다

들어가며

1980년 미국에서 출판된 <코스모스>가 우리나라에 번역된 게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당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책을 읽고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멋진 표현을 빌자면,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느낌이었어요. 많은 이들이 그렇게 느꼈을 겁니다. 지금도 이 책은 우리나라 과학서적분야에서 상위권을 지키고 있는 고전입니다.


지금 이 책을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새벽, 선선한 바람이 부는 어슴푸레한 여명 속에서 <코스모스>를 펼칩니다. 성경처럼 두툼한 이 책을 성경을 읽는 경건한 마음으로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어보려고 합니다. 지금은 이 책을 읽어야 할 때라는 마음의 소리 같은 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 때일까는 읽다 보면 저절로 드러날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2006년에 새로 선보인 특별판이고, 2017년 58쇄 본입니다. 엄청나게 팔렸네요. 그 당시에도 발표된 지 이미 20년이나 된 책인데, 과학의 놀라운 발전 속도를 생각하면 책 속에서 제공되는 정보들은 정보로서의 가치가 많이 떨어진 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2023년. 그로부터 다시 17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이 책은 여전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는 정보 그 이상의 뭔가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이 또 내가 병원으로 간다고 생각해 볼까요. 소지품으로 가방 하나를 들고 갑니다. 여러분과 나는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 길이 마지막 길이 될 수 있다는 걸 압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세상을 떠납니다. 가방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요? 칼 세이건의 아내는 10년이 되도록 가방의 자물쇠를 열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이 그때라는 생각이 들어 자물쇠의 숫자 조합을 이리저리 해보다가 자신의 생일을 넣어봅니다. 그러자 찰각 소리를 내며 자물쇠의 빗장이 열립니다.


저자 칼 세이건의 가방 속에는 이런 물건들이 들어있었다고 하네요. 딸의 생일 축하 카드, NASA의 보안 배지들, <사이언즈> 잡지, 행성 사진 슬라이드들, 누군가의 방문을 전하는 쪽지, 서신 왕래를 하던 고등학교 학생에게 보내는 답장, 독자의 물음에 답장을 부탁하는 편지, 영화 <콘택트>*와 관련된 천체 영상들에 관한 메모, 화성의 운석 구덩이에 관한 어떤 이의 질문이 적힌 쪽지, 그리고 화성과 우주개발과 관련된 워크숍과 기조연설을 수락한 데 대한 감사의 편지들.


시간은 가방 속에서 멈춰져 있었습니다. 멈춘 시간. 평범한 물음과 메모와 방문과 편지들은 가방 주인의 흔적입니다. 그가 아니면 해줄 수 없는 답장, 이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방문, 허공에서 갈 곳을 잃은 감사의 말들...


가방 속 물건들은 성의를 다해 삶을 살았던 주인을 설명합니다. 이 말을 적으면서 나는 과연 성의를 다해서 산 적이 있던가를 되돌아보고, 나라면 황금빛 자물쇠가 달린 가방 안에 무얼 넣고 생의 마지막 병원행이 될 길을 나설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그 가방 안에는 우리의 전 생을 설명해 줄 것들이 들어가겠지요. 칼 세이건의 가방 속 물건들의 일상적이고 소소하며 성실한 흔적들이 마음을 울립니다.


특별판 서문에 인용된 칼 세이건의 글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는지를 전해줍니다. 과학자이되 그는 종교적 인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코스코스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코스모스를 정관 하노라면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아득히 높은 데서 어렴풋한 기억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주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코스모스를 정관 한다는 것이 미지 중 미지의 세계와 마주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울림, 그 느낌, 그 감정이야말로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하게 되는 당연한 반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코스모스>에서

다시 이 빛나는 점을 보라.
그것은 바로 여기, 우리 집,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아는 사람, 소문으로 들었던 사람, 그 모든 사람은 그 위에 있거나 또는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숭상되는 수천의 종교, 이데올로기, 경제 이론, 사냥꾼과 약탈자, 영웅과 겁쟁이,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민, 서로 사랑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앞날이 촉망되는 아이들, 발명가와 개척자, 윤리 도덕의 교사들, 부패한 정치가들, '슈퍼스타', '초인적 지도자', 성자와 죄인 등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 <창백한 푸른 점>에서

* 칼 세이건의 소설은 <콘텍트>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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