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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듣는다는 건

by 스프링버드


모모가 머물고 있던 장소는 소나무숲 속 무너진 작은 원형극장, 잡초가 무성한 극장터 무대 밑에 반쯤 무너진 방이었는데, 사람들은 오랫동안 의논해서 결국 모모를 고아원에 보내거나 동네사람 집에서 살게 하는 대신, 모모를 함께 보살피기로 했다. 그들은 모모가 살고 있는 반쯤 허물어진 집을 깨끗이 치우고 정성껏 수리했다. 미장이는 돌로 조그만 난로를 지어 주고, 목수 할아버지는 널빤지로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를 만들어 주었다. 부인들은 낡았지만 멋진 소용돌이 장식이 달린 쇠침대와 조금 찢어진 매트리스 한 개, 담요 두 장을 갖고 와서 잠자리를 꾸몄다. 미장이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서 벽에 예쁜 꽃그림을 그린 다음에 액자와 못까지 그려주었다. 아이들은 음식을 들고 모였고 이렇게 해서 모모의 입주를 축하하는 조촐하지만 멋진 파티가 열리게 되었다.


모모의 집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모였다. 모모 곁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모를 만난 것이 커다란 행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모에게는 뛰어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재주였다. 어떻게 들어주었을까?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아프게 후회했다. 나를 필요로 했던 누군가를 떠올렸고, 그가 어렵게 꺼낸 말을 가볍게 들었던 일이 너무 부끄러워서 무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한 말보다 내가 한 조언이 얼마나 길었던가, 나는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었던가. 되돌릴 수 없는 시간, 되돌릴 수 없는 대화, 삶의 불가역성. 영원히 낫지 않는 뼈저린 후회.


운이 좋다면, 잘 듣는다는 것을 드물게 경험할 때가 있다. 독백 같은 긴 말 끝에 따라 나오는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나도 아주 조금은 안다. 만나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 앞에서 내 말을 잘 들어준 사람 덕분이었다. 최근 읽고 있는 책에서 우연히 비슷한 경험에 대해 적어놓은 대목을 발견했다. 저자는 자신이 만난 사람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는 귀를 기울이며 호기심에 찬 질문을 던졌고, 나를 평가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다시 모모의 얘기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모모를 묘사하는 대목에서 몇 가지 단어가 마음에 들어온다: 따뜻한, 관심, 온 마음, 들었을 뿐이다, 바라보았을 뿐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찾고 싶어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찾는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작가는 모모의 재능을 '뛰어나다'고 했다. 모모는 사람의 말을 너머서 이 세상 모든 것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알았기 때문이다. 새와 개, 고양이, 그보다 더 작은 동물들, 심지어 바람의 말까지도.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조그만 사내아이 하나가 모모에게 노래를 부르려고 하지 않는 카나리아 한 마리를 가져왔다. 이 일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모모는 일주일 내내 카나리아에게 귀를 기울였고, 드디어 카나리아는 즐겁게 지저귀기 시작했다.

모모는 이 세상 모든 것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개, 고양이, 귀뚜라미, 두꺼비, 심지어는 빗줄기와 나뭇가지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그들은 각각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모모에게 이야기를 했다.


세상의 시끄러움 속에서 묻히는 소리들을 떠올려본다. 아주 작은 소리들, 이를테면 바늘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개가 귀를 긁적이는 소리, 자그마한 한숨소리,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것들. 산책할 때 툭 하고 떨어지는 나뭇잎, 창문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빗방울 소리 같은 것. 하찮으나 귀한 소리들을.


모모는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밤이면 또 다른 소리를 들었다. 낮 동안 묻혀있던, 아주 희미하나 실은 거대한 소리, 바로 정적의 소리였다.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밤이면, 모모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옛 원형극장의 둥근 마당에 혼자 앉아 거대한 정적의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곤 했다.

그러면 모모는 별들의 나라를 향해 열려 있는 거대한 귓바퀴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나직하지만 웅장한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밤이면 모모는 유난히 예쁜 꿈을 꾸었다.


나보다 훨씬 더 운이 좋은 사람이라면, 혹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이 소리를 들어봤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이런 능력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정적의 소리를 듣는 능력. 들어본 적 없는 그 소리를 듣는 길을 막연히 짐작해 보는데, 어쩌면 우리가 정적이 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석가모니부처님 곁에서 20년 넘게 시봉을 든 아아난다라는 제자가 있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나서 제자 오백 명이 모여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했는데 그 방식이 철저했다. 대표로 두 제자가 나서서 자신이 들은 설법을 말하면 나머지 제자들이 동의하거나 교정하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고증한 뒤 모두가 함께 암송하는 식이었다. 이것을 이후에 문자로 기록한 것이 초기경전이다. 대표로 부처님의 말씀을 상기했던 두 제자 중 한 사람이 아아난다였는데, 아아난다에 의해 기록된 경전은 항상 이렇게 시작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바아라아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녹야원에 머물고 계셨다. <초전법륜경>



나는 이 부분이 언제나 끌린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가 아니라 '이렇게 나는 들었다'라는 말속에는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부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다.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부처님의 말씀이 부드럽게 흘러들어오게 하는 것. 무언가가 들어오려면 빈자리가 되어야 한다. 나를 비우고 그곳에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아마도 잘 듣는 이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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