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에게는 친구가 아주 많았다. 마을사람들과 아이들이 모두 모모를 좋아했는데 그래도 특히 더 가까운 친구가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노인(도로 청소부 베포)이고 다른 한 명은 청년(관광 안내원 기기)이었는데, 노인은 말이 없었고 청년은 말이 아주 많았다. 그중에서 청년의 얘기를 해보려 한다.
기롤라모, 줄여서 기기라고 불린 이 친구는 꿈꾸는 듯한 눈을 하고 있는 잘생긴 청년이었고 무엇보다도 말솜씨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농담을 잘 하고 항상 명량했으며 정해진 직업이 없이 아주 다양한 일을 했다. 기기는 관광 안내원으로도 일했는데 방식이 좀 엉뚱했다.
이 일에 필요한 도구라고는 챙 달린 모자밖에 없었다. 그는 몇몇 관광객이 근처에서 헤매고 있다 싶으면 곧 모자를 머리에 눌러쓰고는 정색하고 다가가서, 자기가 주변을 안내하며 모든 것을 설명해 주겠다고 자청했다. 관광객이 허락하면 기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을 열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듣고 있다 보면 머리가 빙글빙글할 정도로 사건과 발생 연도와 이름을 지어내서 마구 늘어놓았던 것이다. 물론 진상을 눈치채고 화를 내며 가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그 이야기를 전부 사실로 받아들이고, 마지막으로 기기가 모자를 내밀면 대가로 진짜 돈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언어는 한편으로는 인간을 깊은 사유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가 되고 한편으로는 풍성한 상상의 세계로 날아오르게 밀어 올리는 도구가 된다. 판타지 소설은 인간의 상상 능력을 동력으로 삼아서 아주 높이 그리고 멀리까지 날아오른다. 없는 세계 속으로 말이다. 거짓말하는 청년 기기에게 이웃들은 꾸며 낸 이야기를 하고 돈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충고했다. 그런데 기기의 대답이 재밌다.
하지만 시인들은 모두 그렇게 하잖아요. 그리고 관광객들도 아무 소득 없이 헛돈을 쓴 건가요? 나는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걸 얻었다고 생각해요. 학술 서적에 쓰여 있는 얘기든 꾸며 낸 얘기든 무슨 차이가 있어요?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고등학교 시절에 한 여선생님이 수업 중에, 딸이 거짓말을 참 잘해서 자기가 칭찬을 해줬다는 말씀을 하셨던 게 기억난다. 농담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 나는 그 말을 진짜로 받아들였다. 평소 언행으로 보아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거짓말을 장려하는 동시에 냉철한 비판 정신을 발휘할 줄 아는 분이셨고, 삐딱한 사춘기는 그분을 은근히 존경했더랬다.) 거짓말은 항상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우리가 읽는 모든 허구, 픽션이 사실상 거짓말인 걸.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문학의 진실이 논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기기의 대답 속에는 진실 한 조각이 들어있다. 사람들은 원하는 걸 얻었다.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게 이야기라는 사실. 문학은 듣고 싶어 하는 걸 이야기하는 것이고, 독자는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문학을 골라서(!) 읽는다. 적어도 나는 이제껏 책에서 책으로 꼬리물기하듯이 이야기를 읽어왔는데, 모두 내가 읽고 싶었기 때문에 선택한 독서 여정이었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해답을 찾고 싶었고,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격려와 확신을, 때로는 증거와 논거를, 때로는 은둔처를, 때로는 친구와 스승을 수소문했다. 그런데 기기의 문제는 소설이 진행되면서 더 심각하게 논의된다. 과연 원하는 걸 들려주는 것만이 이야기의 역할일까,에 대해서.
모모의 세계는 곧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의문의 회색 신사들이 나타나 사람들에게서 비밀스럽고도 교활한 방법으로 시간을 훔치기 시작한 것이다. 인생에서 뭔가를 이루고,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뭔가를 손에 쥐어서 남보다 더 많은 걸 이룬 사람, 더 많은 걸 가진 사람이 되려면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말에 사람들이 설득당한다. 가령 이발사 푸지 씨는 회색 신사의 기준에서 보자면 앵무새를 돌보는 데 1379만 7000초를 낭비했고 어머니를 보살피느라 5억 5018만 1000초를 허비했다. 그리고 잠자기 전 그날 하루를 돌아보는 15분의 시간들도 모두 낭비다. 회색 신사의 계산을 받아 들고 푸지 씨는 참담한 심정이 되어서 이렇게 생각했다. 저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결산표로구나. 회색 신사는 계산을 교묘하게 조작해서 푸지 씨의 42년 세월의 대차대조표를 0,000,000,000초로 나오게 맞춰놓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 남은 시간이 0이라니! 그런데 살아오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남은 시간이 어떻게 있을 수 있죠? 시간은 이 순간에도 계속 과거로 흘러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반박을 해볼 만도 한데.
사람들은 회색 신사의 계략에 넘어가 시간을 아끼기 시작한다. 그들이 아낀 시간은 시간 금고로 들어간다.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서 저축 양은 엄청나게 불어날 테고, 사람들은 그걸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만기일을 꿈꾸며 지금 이 순간은 앞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쁘게 일에만 몰두한다. 회색 신사들은 시간 금고에 저장된 시간을 에너지로 삼아서 연명하는 존재들이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시간이 필요한 존재들. 그런데 모모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다. 모모는 시간이 누구보다 많은 아이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줄 시간이 많고도 많았다. 모모는 의도치 않게 회색 신사들의 사업을 방해하게 되고, 회색 신사가 모모를 회유하기 위해서 찾아왔지만 오히려 자신들의 정체를 고백하고 만 것이다. 모모가 회색 신사의 말을 진심으로 너무 잘 들어줬기 때문에.
모모는 도로 청소부 베포, 관광 안내원 기기와 의논한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아이들을 모아서 회색 신사들의 계략을 세상에 알리는 대규모 모임을 열자! 베포는 모모와 아이들이 위험해질 것을 걱정한다. 하지만 기기는 걱정도 팔자라며 코웃음을 친다. 그러자 베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내가 보기에 자넨 모모가 설명한 것이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 것 같군.
기기는 대답한다.
'진실'이라는 게 대체 뭔데요? 아저씬 정말 환상이 없는 분이세요. 온 세상이 하나의 긴 이야기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함께 연기를 하는 거예요. 나도 믿어요, 아저씨, 믿는다니까요. 난 모모가 한 말을 전부 믿어요. 아저씨와 똑같이 말이에요!
미하엘 엔데는 우리에게 묻는다. 진실이라는 게 뭘까? 우리는 다만 긴 이야기 속에서 연기를 하는 것뿐일까? 기기의 말처럼, 원형극장에 관한 설명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든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든 차이가 없는 것일까? 기기가 이후에 들어서게 되는 길은 막다른 골목인 걸로 보아, 작가는 기기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독자인 우리에게 이야기와 진실의 관계를 생각해보자고 기기를 통해 권하는 것일 뿐.
현재는 곧바로 과거가 되고, 현재의 모든 일들은 결국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이야기로 변형된다. 아주 단순화해서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숨 쉬고 웃고 먹고 말하는 그의 몸이 사라지고 나면 오로지 기억만이 그를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은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꾸며낸 것일 수 없다. 생생하게 살아있었던 그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니까. 읽을 때마다, 기억할 때마다, 그를 지금 내 앞에 불러내고 되살려내는 이야기. 그러니 기기는 틀렸다. 온 세상은 하나의 긴 이야기 같지만 그 이야기 하나하나는 존재와 연결돼 있다. 행복하고 슬퍼하고 생각하고 느꼈던 존재, 생생하게 만져지는 기쁨과 고통을 살았던 존재가 그 이야기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살아있다'라는 말로 종종 형용하곤 한다. 우리 자신은 가상의 세계 속에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존재로 지금 이 삶을 살아내고 있는 존재임은 당연하다.
모든 이야기가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허구인 이야기가 진실이 되려면, 적어도 진실을 가리키려면, 사람들이 원하는 걸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더 해야 하지 싶다. 사람들이 진심으로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게 하는 것. 보아야 할 걸 보도록 이끄는 것. 힘을 내게 해주는 것. 두려움을 떨치게 보호해 주는 것. 품어주는 것.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 무엇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인가를 숙고하게 만드는 것.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문학 곧 이야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진실은 하나의 명제로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닐지 모른다. 좀 더 모호한, 알 수 없는, 애매한 개념이 진실이라는 말로 명명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튼 문학은 그런 일들을 하되, 무척 온건하고 풍성한 방식으로 하지 않나,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파이 이야기>는 망망대해에서 호랑이와 작은 보트를 타고 227일간을 표류한 소년의 이야기인데, 그가 구조된 뒤에 보험회사 직원 두 사람이 소년을 찾아온다. 보험금을 계산하려면 사실을 알아야 했다. 소년은 호랑이가 오랑우탄과 얼룩말과 하이에나를 어떻게 잡아먹었고 자신이 호랑이와 어떻게 공존했는지, 바다에서 어떤 무섭고 환상적이며 기괴한 체험들을 했는지를 이야기해 줬다. 보험회사 직원들은 소년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다. 그러자 소년은 되묻는다.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미 창작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그러고 나서 소년은 직원들에게 바다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일들을, 사람이 저지른 살생과 악행들을 사실대로 말해준 뒤에 묻는다.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문학은 현실을 사는, 살았던, 살게 될 이들의 이야기를 변형해서 들려준다. 대단히 풍성하고도 온건한 방식으로. 그래서 책의 표지를 열고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며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뒤표지를 닫을 때까지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를 안심하고 안전하게 통과한다. 좀 더 정화된 상태로, 더 깊어지고 높아지며 확장되어서, 비록 잠시나마, 환하게 빛을 발하는 존재로 변한다. 아마도 그것이 문학의 본질이 아닐까.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