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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 추격과 느긋한 도주

by 스프링버드


모모는 위험해졌다. 모모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무의식 중에 실토한 회색 신사는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모든 시간을 그 자리에서 박탈당한다. (모든 회색 신사들이 입에 물고 태우는 시가가 그들의 목숨과도 같은 시간이다.)


두 회색 신사가 벌써 그의 납회색 서류 가방과 작은 시가를 빼앗았다. 그러자 아주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시가를 빼앗자 유죄판결을 받은 남자의 몸이 급속히 투명해져 갔다. 그의 비명 역시 점점 낮아지고 가냘파졌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렇게 서 있던 남자는 문자 그대로 무(無)로 해제되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재티 몇 점이 바람에 둥글게 맴도는가 싶더니 곧 그것마저 사라져 버렸다.


회색 재판관은 말한다.


... 아무튼 그 이상한 아이를 손을 좀 봐주긴 해야겠군요... 우리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습니다...


재판이 열리던 그 시각에, 먼 곳의 시계탑에서 밤 열두 시 종소리가 울리던 그때, 모모는 원형극장 폐허의 돌계단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모모의 맨발을 살며시 건드렸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커다란 거북 한 마리가 머리를 치켜들고 모모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거북은 금방 무슨 말이라도 꺼낼 듯이 영리하게 보이는 까만 눈을 다정하게 반짝였다.


거북 등에서는 흐릿하게 글자가 빛나고 있었다. 같이 가자! 그리고 곧 거북은 느릿느릿 걸었고 모모는 의아해하면서도 거북의 뒤를 따라 조금씩 걸음을 떼어 천천히 대도시 쪽으로 접어들었다. 소설의 10장 맹렬한 추격과 느긋한 도주는 제목 그대로 속도에 관한 이야기다. 시간의 속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거북이의 느린 걸음으로는 회색 신사들을 따돌릴 수가 없어 보인다. 엄청나게 많은 회색 신사들이 모두 나서서 모모의 흔적을 찾아다니고 차를 동원해 도시를 수색했기 때문이다.


그날 밤 근처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이 그칠 기미가 없는지 의아해했다. 심지어는 좁다란 골목길과 울퉁불퉁한 자갈길에서도 희부옇게 날이 밝을 때까지 소음이 그치지 않았다.


수많은 군중과 수많은 차가 뒤엉키고 현란한 광고 전광판이 번쩍이는 대도시를 거북이와 모모는 천천히 가로지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누구도 이들 둘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거북을 앞세우고 걸어가는 아이를 말이다.


모모와 거북은 부러 피할 필요도 없었고, 누구와 부딪히지도 않았다. 그들 때문에 급정거를 하는 자동차도 없었다. 거북은 어느 순간에 자동차가 지나가지 않는지, 행인이 지나가지 않는지 미리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한 번도 서두르지 않았고, 기다리느라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모모는 그렇게 천천히 걸으면서도 그렇게 빨리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에 갈수록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거북과 모모가 이럴 수 있었던 까닭은 미하엘 엔데가 거북에게 딱 30분만큼의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작가의 전지전능한 권한으로) 줬기 때문인데, 아무리 그래도 군중 속에서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고 천천히 걸어간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여기에 조금 더 상상을 덧붙여본다. 이들 둘에게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 말이다.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인슈타인이 발견해 냈지만, 이미 2500년 전에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성탄을 축하하는 시기에 눈치 없이 석가모니부처님의 일화를 꺼내서 좀 죄송하다...




그 당시 앙굴리마알라라고 불리는 극악한 강도가 있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였고 폭력을 휘둘렀으며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대해 무자비하게 굴었다. 시골과 도시, 여러 지역들이 그로 인해 황폐해졌다. 앙굴리마알라는 자기가 죽인 사람들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서 걸고 다녔는데, 부처님은 부러 앙굴리마알라가 나타나는 길로 가셨다. 소치는 사람들과 양치기들과 농부들, 여행자들이 부처님을 말렸다. 하지만 부처님은 아무 말없이 걸어가셨다. 부처님이 멀리서 오시는 걸 보고 강도 앙굴리마알라는 생각했다.


놀라운 일이다.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이로구나! 사람들이 심지어 마흔 명씩 떼를 지어 올 때도 있는데 지금 이 사문(불교수행자)은 동행도 없이 혼자서 오고 있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다. 필히 저 사문의 목숨을 앗아야겠다.


칼과 방패를 움켜잡고 활과 화살통을 단단히 매고서 그는 부처님을 뒤쫓아 갔다. 그런데 아무리 빨리 달려도 보통 걸음걸이로 가는 부처님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멈춰 서서 소리쳤다. 멈추시오, 사문이여! 멈추시오, 사문이여.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여래는 이미 멈췄다. 앙굴리마알라여, 너도 멈춰라. 앙굴리마알라는 부처님이 걷고 있음에도 멈췄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해서 부처님에게 물었고,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사문이시여, 당신이 걸어가고 있으면서도 이미 멈췄다고 나에게 말하고,

이제 내가 멈춰 섰는데도 당신은 내가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문이여, 내가 당신께 묻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당신은 이미 멈췄고, 나는 멈추지 않았다는 겁니까?"


"앙굴리마알라여, 여래는 영원히 멈추었소.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폭력을 그만두었으므로.

그러나 그대는 그 어떤 생명에 대해서도 폭력을 자제하지 못하오.

이것이 바로 여래는 이미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이오."

<붓다의 일생>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음의 멈춤이고 미하엘 엔데가 말하고 싶은 것도 비슷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보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각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는 파격적인 발상이다. 체감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전에서 전해지는 장면에서, 시간은 실제로(!) 다르게 흘렀다. 모모 이야기에서도 역시 시간은 실제로 다르게 흐르는 것으로 보인다. 거북과 모모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회색 신사들의 시간은 눈이 핑핑 돌만큼 빠르게 흐르고 있고 대도시의 시간도 그렇게 흐른다.


시간은 도도히 흐르는데, 시간이라는 강은 거대하기에 어떤 곳의 유속은 느리고 어떤 곳의 유속은 휘몰아치며 또 어떤 곳의 유속은 한동안 멈추기도 한다. 그러나 속도는 다를지언정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그 강물 위에서 떠밀려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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