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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꽃-1

by 스프링버드



<모모>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좋은 소설은 절대 한 마디로 요약할 순 없지만,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루는 소설을 좋은 소설이라고 할 때 구심점이 되어주는 주제가 <모모>의 경우에는 시간인 것 같다. (하지만 개인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 싶다. 다른 해석, 이를테면 사람과의 관계나 인간애 같은 주제를 생각해 보는 독자도 있지 않을까?)


거북은 모모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대도시의 중심을 지나서 도시 가장자리로 이어진다.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도시 풍경은 낯설지 않다. 정신없이 돌아간다,는 말로 묘사될 법한 이 풍경은 한참 산업화가 이뤄지고 있는 대도시로 보인다. 이 소설이 출간된 해가 1970년인 걸로 미루어, 전후 독일이 열심히 성장하고 있을 시기를 작가는 묘사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집중되는 대도시는 외곽으로 갈수록 허름해진다.


그들이 걷고 있는 구역의 집들은 점점 잿빛이 되고, 더욱 허름해졌다. 곳곳에 진흙탕물이 고인 거리 양쪽으로, 회칠이 부슬부슬 떨어지는 고층 임대 아파트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어두웠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까지는 현실적인데 이제 판타지의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가 나오고 모모와 거북은 그곳으로 넘어간다. 판타지 소설 속에서 둘은 이미 판타지적 존재인데, 그 세계 속에는 다시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있다는 게 재밌다.


모모는 처음에는 어스름한 새벽 햇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이상한 빛은 갑자기, 정확히 말하면 모모와 거북이 그 거리로 접어든 순간 비치기 시작했다. 이곳은 밤도 아니고, 그렇다고 낮도 아니었다. 어슴푸레한 빛은 새벽 햇살 같지도 않고, 저녁 햇살 같지도 않았다. 그 빛은 모든 사물의 윤곽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선명하고 뚜렷하게 드러내 보였다. 하지만 빛이 나오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사방에서 동시에 빛이 나온다고 해야 할 듯했다. 도로의 아주 작은 돌멩이까지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그림자들은 모두 제가끔 다른 방향으로 뻗어있었기 때문이다. 저 나무는 왼쪽에서, 이 집은 오른쪽에서, 그리고 저 위쪽의 기념비는 앞쪽에서 빛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은 계속 다르게 흐르고 있다.


저 멀리 앞쪽에서 모모는 거북 뒤를 따라 눈처럼 새하얀 텅 빈 거리와 광장들이 복잡하게 얽힌 곳을 꼬불꼬불 지나고 있었다. 어찌나 천천히 걸었던지 오히려 발 밑의 도로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가고, 건물들이 휙휙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 거리'라고만 명명된 거리를 지나자 '좁은 골목'이 나왔고, 골목길은 직각으로 꺾이며 언제나 없는 거리라는 표지판이 붙은 골목으로 이어졌다. 그 골목 끝에 집이 있었다. 그 집 대문에는 또 하나의 표지판이 걸려 있는데, 이름은 아무 데도 없는 집. (거리를 지나 그 집까지 가는 길은 그냥 평범한 걸음으로는 갈 수 없는데 여기서는 비밀로 남겨둘까 한다.)


대문은 스르르 열렸고, 천장이 높은 긴 복도를 지나가자, 복도 끝에 작은 문이 나왔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들어가는 아주 작은 문처럼 이곳에도 모모가 허리를 구부려야 겨우 지날 만큼 작은 문이 있다. 신비한 세계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면 '아이가 되어 허리를 구부리고 가장 겸손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나는 이 장면을 읽었다.


작은 문을 열자 갖가지 모양과 크기의 수많은 시계들이 수천 가지 소리로 재깍재깍 똑딱똑딱 땡땡땡 울리는 어마어마하게 큰 교회 예배당보다도, 무지무지하게 큰 기차 대합실보다도 더 커다란 홀이 있었다. 그 공간에서 신비한 인물 호라 박사가 모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노인은 점점 더 젊어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바로 앞에까지 와서 모모의 두 손을 잡고 반갑게 흔드는 노인은 모모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


시간은 시간의 주인, 즉 우리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오면 죽은 시간이 된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호라 박사의 설명이다. 회색 신사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실제로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역시 호라 박사의 설명이다. 이 말을 곰곰이 따져보면, 이런 의심이 든다. 혹시 내가 바로 그 회색인간이 아닐까? 나 자신이 바로 시간을 저축하라고 독촉하는 회색인간이고, 내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나 자신을 협박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


한편으로 또 생각해 보게 된다. 도대체 나 자신의 시간이란 뭐지? 흔히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살라고 조언하는데 이 말은 자기가 원하는 걸 하고 자기 목표를 추구하며 살라, 혹은 단순하게는 자기를 위한 시간을 가지란 뜻 같다. 이를테면 몇 년 전 우리 아이들이 한창 클 때, 한 친구는 나에게 아이들한테 너무 매이지 말고 여행도 가고 친구도 만나고 '자기 인생을 살라'라고 했다. 그 조언을 들으며, 나는 그런 게 내 인생일까, 의심이 들었다. 그런 게 내 인생이라면 너무 시시하지 않나? 아이들한테 따뜻하고 정성 어린 밥을 해주는 게 여행 가는 것보다 가치 없나? 공부도 많이 하고 능력도 좋아서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으로 성공할 수도 있었던 한 친구는 큰딸이자 큰며느리로 사느라 자기 시간(!)이 거의 없이 살고 있지만 나는 그 친구가 자기 인생을 너무나 잘 사는 것만 같은데. 진짜 자기 시간을 산다는 건 어떻게 사는 걸까? 삶이란,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까닭은, 단순히 '자기 인생을 살라'는 진부한 말 이상일 것 같다. 정확히 그게 뭔지는 우리 각자가 생각해 보고 파악해야 할 개인적 과제일 것이다.


미하엘 엔데는 우리의 시간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데...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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