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기다림과 외로움

by 스프링버드


모모가 돌아온 옛 원형극장 터는 적막했다. 호라 박사와 함께 했던 하루가 이곳에서는 일 년에 해당했고 그 사이 많은 일이 벌어졌다. 회색 신사들이 세상을 바꿔놓았던 것이다. 친구들은 성공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아이들은 모두 탁아소에 맡겨졌다. 모모가 찾아간 니노 아저씨와 아줌마의 허름한 가게는 커다란 유리창으로 된 네모난 콘크리트 건물에 니노의 빠른 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는데 손님들은 조급해하며 화를 냈고 니노는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볼 수 없었고 겨우 만난 몇은 '노는 법을 배우러' 탁아소에 간다고 말했다. 명랑한 이야기꾼 기기의 상황도 비슷했다. 회색 신사들의 술수로 기기는 유명한 이야기꾼 기롤라모가 되어 끔찍하게 일에 쫓겨서 모모에게 내어줄 시간이 없었다.


기기는 기진맥진해서 손으로 눈을 쓸어내리며 짤막하게 씁쓸한 웃음을 웃었다.

"보다시피 나는 이 꼴이 되었단다. 아무리 원해도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 난 끝장이 났어. '기기는 기기인 거야!' 모모, 이 말 생각나니? 하지만 기기는 기기로 남아 있지 못했단다. 모모, 얘기 하나 해 줄까?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건 꿈이 이루어지는 거야.


기기는 이 세상 모든 것에 신물이 났다고 말했다. 거리 청소부 베포 할아버지도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회색 신사들의 거짓말에 속아서, 모모를 위해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달리듯이 거리를 쓸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주일, 몇 달이 흘렀다. 여전히 모모는 혼자였다.


모모는 원해 항상 혼자였던 아이고,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모모는 설명이 불가능한 외로움을 느꼈고, 기다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되었다. 친구들을 기다린 그 몇 달은 모모가 겪었던 그 어떤 시간보다 긴 시간이었다. 모모는 호라 박사를 만나 부탁을 하고 싶었다.


저에게 더 이상 시간을 나누어 주지 마세요!라고. 혹은 이렇게 애원했으리라. "'아무 데도 없는 집'에서 영원히 박사님과 같이 살게 해 주세요."라고.


외로움과 기다림은 짝을 이룬다. 홀로 있는 걸 외로워하지 않았고 기다리는 걸 어려워하지 않았던 모모에게 둘 다 고통이 된 건,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고 재미를 나눌 친구. 친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일 텐데, 그저 소박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답을 찾아보자면, '뭔가를 나눌 수 있는 내 앞의 누구'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고도를 기다리며>의 그 대단하고 철학적이며 허무하기 짝이 없는 고도를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만 같다. 기다림은 훨씬 쉬워지고, 외로움은 훨씬 가벼워지는 걸 느낀다. 물론 인간의 소외는 이렇게 단순하게 다룰 문제는 아닐 테지만, 가끔은 아이 같이 되어보고 싶다.


아무튼 모모는 기다림과 외로움의 막다른 길까지 몰린다. 거의 모든 모험이야기는 절망의 끝까지 몰렸을 때 비로소 전환된다. 막다른 길에 출구가 있다는 건 픽션의 문법이다. 모모는 여느 때처럼 친구들을 찾아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던 어느 날 밤, 길가의 짐차 위에서 지쳐 잠이 들어 어지러운 꿈을 꿨다. 베포 할아버지가 빗자루를 균형 잡는 막대 삼아 들고 까마득한 어두운 심연 위에 가로 걸린 밧줄 위를 흔들흔들 걸으며 외치고 있었다. "어디가 끝이지? 어디가 끝인지 보이지가 않아!" 끝없이 긴 종이 뭉치를 입에서 토해 내고 있는 기기도 보였고, 트럼프 카드처럼 납작해진 아이들도 보였다. 울며 잠이 깬 모모는 문득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으리라. 그동안 내내 자기만, 자기의 쓸쓸함과 자기의 두려움만 생각했지만 정작 곤경에 빠져 있는 건 친구들이란 걸 깨달았다. 회색 신사들에게서 도망치지 말고 그들을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그들이 문제를 만들었으므로 문제를 풀려면 그들을 만나야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모모의 마음속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모모는 이제 어려움을 이겨 낸 거였다. 모모는 엄청나게 넓고 텅 빈 광장에서 어둠 속을 향해 소리쳤다. 나 여기 있어요! 회색 신사들이 몰려들었고 이제 모모는 그들과 대면했다.


회색 신사들은 친구들을 도우려면 호라 박사에게 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호라 박사와 사귀고 싶다는 이유를 댔지만 실제로는 그를 만나 시간을 모두 빼앗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모모는 거절했고,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길을 아는 건 거북 카시오페이아밖에 없었으니까. 회색 신사들은 이제 거북을 찾아 나선다. 모모는 자기가 일을 망쳐버렸다고 생각하며, 제발 카시오페이아가 그들 눈에 띄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문득 카시오페이아가 모모 앞에 나타나 다시 한번 호라 박사에게 모모를 데려간다.


이후의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이야기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다. 모모는 엄청난 모험 끝에 회색 신사들을 물리치고 이야기는 행복하게 마무리된다. 아무렴, 판타지는 선한 힘이 악한 힘을 끝내 이겨야 마땅하지.




소설 초입으로 돌아가 모모라는 소녀를 다시 보자. 모모는 어느 날 문득 옛날 원형극장 터에 나타난 아이다. 몇 살인지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손으로 어딘가 저 먼 곳을 가리켰다. 모모라는 이름은 직접 지었다고 했다. 칠흑 같이 새까만 고수머리, 치렁치렁한 치마, 헐렁한 남자 웃옷 속에서 오로지 '깜짝 놀랄 만큼 예쁜 커다란 눈'만 보이는 모습의 이 소녀는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다. 이 이야기 자체가 옛날의 커다란 도시들 가운데 한 곳이라는 막연한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 시각을 달리 해서 보면, 원형의 이 옛 극장 터는 태고의 시간이 머무르는 자리다. 그 자리에 신비한 소녀가 있고 동네 사람들과 아이들은 살림살이와 음식과 저마다의 사연을 들고 소녀를 찾아간다.


이야기의 시작과 중간과 끝까지 모모를 따라가다 보면 이 작은 소녀는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소녀원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원형이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행동 유형의 조건이라고 정의되는데, 인류가 태초부터 경험해 온 모든 경험들이 침전된 선험적 틀 같은 것이다. 원형은 상으로 나타나는데 그중에 소녀원형상이란 게 있다. 신화나 민담이나 종교, 예술, 혹은 사람들의 꿈 등에서 나타나는 소녀는 현실의 소녀가 아니라 하나의 상징으로서 움직인다. 신화와 민담을 무척이나 닮은 이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 역시 충분히 상징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안에서 가만히 우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존재. 한없이 깨끗하고 맑은 영혼. 우주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존재가 세상 어디에 있겠나. 그런데 있다. 바로 우리 마음속에 말이다. 하늘의 별을 딸 수 없듯이 이 소녀를 만날 수는 없다. 다만 구름이 날아가고 맑아진 밤하늘에서 별을 바라보듯이 마음에서 잡념을 거두고 맑아진 상태에서 작은 어린이를 떠올려볼 수는 있겠다. 혹은 꿈에 나타날 수도 있다. 어쩌면 길에서 우연히 본 어떤 아이가 유독 내 마음을 끌 때 그 아이는 내 마음속 소녀원형상을 어딘가 닮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모모가 하는 모든 모험이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되는 셈이다. 한편으로는, 시간을 아끼고 성공을 추구하고 사회의 유능한 구성원을 만들려고 아이들을 놀지 못하게 막는 우리. 다른 한편으로는, 폐허의 무너진 방을 청소하고 잠자리를 마련하고 책상과 의자를 들여놓고 벽에 액자를 그려주며 아이를 함께 보살피기로 결심하는 우리. 음식을 들고 찾아가 함께 나누고, 상상의 나래를 펴며 신나게 노는 우리. <모모>는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얘기했던 기다림와 외로움의 문제는 다르게 보인다. 우리가 끝없이 기다리는 친구는 우리 자신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이야기를 나누고 보살핌을 기다리는 순수한 아이가 우리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며 외로움에 지쳐있다고. "이 세상 모든 것에 신물이 났다"라고 외치고 싶을 때 우리 마음속 텅 빈 밤거리에서 어떤 아이가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을지 누가 알리. "나 여기 있어요" 하고.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07화시간의 꽃-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