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모모>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책을 덮지만 작가가 창조한 세계는 덮이지 않는다. 한동안은 생생하게 내 앞에 펼쳐진 채로 있을 테고,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도 가끔, 문득, 떠오르곤 하리라. 그동안 많은 글을 읽어왔지만 그것들이 설사 잊히는 수는 있어도 서로 겹치는 때는 잘 없는 것 같다. 글로 창조된 세상은 선명하게 고유한 시선과 목소리를 갖는다. 그리고 한결같이 "우리는 이렇게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본답니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책에 길이 있다는 말은 진부하기 이를 데 없고 그 말에 배신감을 심하게 느끼고 비웃던 시기가 있었지만, 여전히 책을 읽고 있고 대체로 책을 나침반 삼아 어찌어찌 지금까지 왔다. 독서 행위는 더도 덜도 말고 '재미'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나는 사람들이 세상을 어떤 해법으로 헤쳐나가고 있는지 궁금하고 때로는 절박하게 알아야 해서, 재미없는 책도 꾹 참고 읽곤 했다. 비유하자면, 독서는 혼자 열심히 굴을 파는 행위와 부분적으로 닮았고, 반대로 다른 사람들의 굴 파는 모습을 열심히 지켜보는 행위와도 어쩐지 닮았다. 아무튼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을 만들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같은 목적을 가졌다는 점에서, 동료다.
옛날이야기에는 요정이 나오는데 <모모>에도 요정 같은 존재가 있다. 동그란 작은 거북 카시오페이아. 너무나 사랑스러운 이 거북 덕분에 모모나 독자는 고난 속에서도 안심하고, 외로움 속에서도 위로받으며, 추위 속에서도 온기를 품는다. 거북 등에 빛나는 글자를 밝혀서 모모와 대화한다는 작가의 발상이 나는 좋다. 말이 아니라 글이라는 것에 대해서. 글은 조용하고, 글은 기다려주며, 글은 귀 기울여 들어주고, 글은 차분하고 단순 간결하다. 글은 빛이다.
폴 오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소설은 작가와 독자가 동등하게 기여한 협업의 결과물이며, 낯선 두 사람이 지극히 친밀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영원히 아는 사이가 되지 못할 사람들과 평생 대화를 나눠 왔으며, 앞으로도, 숨이 멎는 날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제가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 2006년 10월. 아스투리아스 왕자 문학상 수상 연설 일부.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에 수록
폴 오스터의 말에 십분 공감하고 동감한다. 모든 글은 독자에게 와서 완성된다는 생각을 언제부턴가 했다. 작가가 완전히 의식적으로 작품을 쓰지는 않는다는 생각도 했다. 작가 자신도 모르는 생각이 어느 순간 번득 떠오른다는 건 우리의 사고가 의식에만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 아닌가. 내가 낳은 자식이 내가 아니듯이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도 작가 자신이 아니고 그들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산다. 비록 책 속에서라도. 독자는 그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을 채워 넣는다. 작가의 무의식에 독자의 무의식이 반응하며 독서 행위 중에 낯선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독자인 우리는 금을 만들고자 염원하며 마치 연금술사처럼 책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미하엘 엔데에 대한 정보는 비룡소에서 나온 <끝없는 이야기> '옮긴이의 말'에서 얻을 수 있는데, 그의 유년시절은 다분히 예술적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유명했고 어머니 역시 화가였으며 화가와 조각가, 문인들을 항상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철학과 종교학, 인간학적인 문제들, 연금술과 신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유가 없지 않았다. 엔데는 독일 나치의 제2차 세계 대전을 목격했고,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드라마 학교를 나와 시골 마을을 다니며 연극배우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때의 생활을 작가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좋은 경험이었고 건강한 시절이었습니다. 뭔가 쓰려고 하는 사람은 이런 학교에 가야 합니다. 극장이 아니라 건강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예를 들면 옷장은 어떻게 만들고 문을 어떻게 붙이는 게 좋은가 등을 가르쳐 주는 진짜 세계. 이런 곳이 좋은 문학 학교이지요. - 미하엘 엔데, <모에를 인터뷰하다, 토시오 타무라와 함께 원고를 작성하다>, 작가의 유고(1992)에서
'옮긴이의 말'에서 읽은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엔데가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했다는 경험이다. 궁전 광장에서 이야기꾼들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홀린 듯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칠리아 언어였고 중간중간 나무칼로 박자를 넣었다.
이야기꾼들은 때때로 재미있을 만한 대목에서 이야기를 끊고 사람들이 돈을 던져 주기를 기다렸다가 돈을 던져 주는 소리가 만족할 만큼 울리면 이야기를 계속했지요. 오를란도와 리날도라는 시칠리아 영웅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앉아서, 누워서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며 온 저녁을 다 보냈지요. 그들은 정말 인상 깊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나에게 그 이야기는 매우 낯설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물었지요. 저 이야기는 어디에 나오는 이야기인지. 그 이야기는 알렉상드르 뒤마라는 사람이 쓴 소설을 이야기하기에 맞게 다시 만든 것이라 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목표입니다. 백 년쯤 뒤에 내가 지어낸 이야기를 팔레르모에 있는 이야기꾼들이 거리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제임스 조이스가 쓴 <율리시스>로는 거리에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끔 하지 못하지만 뒤마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문학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작가들이 스타일을 만든답시고 이리저리 꾸미고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어둠의 고고학>에서
엔데는 팔레르모의 이야기꾼 같다. <모모>는 옛날이야기처럼 시작해서 옛날이야기처럼 끝난다. 옛날옛날에로 시작해서 불행은 끝나고 모두 행복해지는 이야기.
사실, 꼬마 모모와 베포 할아버지가 그날 옛 원형극장에 돌아와 보니 친구들이 전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관광 안내원 기기, 파올로, 마시모, 프랑코, 꼬마 동생 데데를 데리고 다니는 소녀 마리아, 클라우디오를 비롯하여 옛날에 모모를 늘 찾아왔던 아이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음식점 주인 니노, 니노의 뚱뚱한 아내 릴리아나와 갓난아기, 미장이 니콜라도 보였다. 한 마디로 예전에 늘 모모를 찾아왔고, 모모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이웃사람들이 모두 와 있었다. 그들은 파티를 열었다. 모모의 친구들만이 열 수 있는 정말 즐거운 파티였다. 파티는 저 옛날의 별들이 뜰 때까지 계속되었다.
환호성을 지르고, 서로 얼싸안고, 악수하고, 큰 소리로 웃고,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도 잦아들자, 모두들 풀이 웃자란 돌계단에 둥글게 앉았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모모는 비어 있는 둥그런 마당 한가운데에 섰다. 모모는 별들의 음성과 시간의 꽃을 생각했다.
모모는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엔데가 불교를 알았을까? 불교는 윤회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다. 삶 자체가 괴로움이고 우리는 괴로움으로 이어지는 생과 사를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 불교 가르침의 요체인데, 아무튼 죽음 너머에는 또 다른 태어남이 이어진다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우리가 '돌아가는 곳'이 또 다른 삶이든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이든, 죽음은 그저 지나가는 문일지도 모른다. 정원으로 들어가 천천히 거닐고 나오는 문, 이사한 새 집의 문, 고궁 담의 우아하고 소박한 둥근 돌문 같은 문들 말이다.
"그럼 제 가슴이 언젠가 뛰기를 멈추면 어떻게 돼요?"
"그럼, 네게 지정된 시간도 멈추게 되지, 아가. 네가 살아온 시간, 다시 말해서 지나 온 너의 낮과 밤들, 달과 해들을 지나 되돌아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게다. 너는 너의 일생을 지나 되돌아가는 게야. 언젠가 네가 그 문을 통해 들어왔던 둥근 은빛 성문에 닿을 때까지 말이지. 거기서 너는 그 문을 다시 나가게 되지."
"그 문 바깥쪽에는 뭐가 있는데요?"
"그럼 너는 네가 가끔 들었던 나지막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가게 되지. 거기서 너는 그 음악의 일부가 되어 스스로 하나의 음이 된단다."
엔데는 은빛 성문 바깥의 세계를 확실히 믿었던 듯싶다.
구체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세계의 뒤에는 틀림없이 또 다른 하나의 세계, 아니 어쩌면 많은 세계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지각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정말로 그 세계는 있을 것이다. 아니 구체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세계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 세계는 있을지도 모른다. - <어둠의 고고학>
아마 윤회도 믿었을 것이다. <모모>에서 도로 청소부 베포, 자세하고도 깊숙이 보는 이 사람은 수많은 겹으로 쌓인 생을 말하고 있다.
한낮에... 모든 것이 한낮의 열기에 잠들어 있을 때에... 종종 있는 일이야..., 그때 이 세상은 투명해지지... 마치 강물처럼 말이야, 알겠니?... 바닥까지 다 들여다보이는 거야."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잠자코 있다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말했다.
"거기, 그 아래 밑바닥에는 다른 시대가 있어."
그러고는 다시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하며 적당한 단어를 찾았다. 하지만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 모양인지, 갑자기 아주 평범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옛 성벽 길을 쓸었어. 성벽에는 서로 다른 색깔의 돌이 다섯 개가 있었지. 모모, 알겠니?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먼지 속에 커다랗게 T자를 그리더니, 고개를 갸우뚱하게 숙이고 글자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그걸 다시 알아보았어. 돌들 말이야."
그러고는 한참 잠자코 있다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다른 시대였어. 성벽을 쌓던 때였어.... 일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지... 하지만 두 사람이 있었어. 그들은 거기에 돌을 끼워 넣었지... 표시였던 거야, 알겠니?... 나는 그걸 알아보았던 거야."
그는 손으로 눈꺼풀을 쓸어내렸다. 말하기가 무척이나 힘이 드는 것 같았다. 다시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옛날에 다른 모습이었어. 두 사람 말이야. 아주 달랐어." 그러고는 거의 화가 난 것처럼 단호한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를 다시 알아보았어... 너하고 나 말이야. 나는 우리를 알아보았던 거야!"
모모와 베포는 옛날에도 만난 적이 있었다. 베포의 말에 따르면, 우리 삶은 되풀이된다. 우주가 생겨나고 소멸되어 다른 우주가 생겨날 때까지의 엄청난 시간 단위 '겁'을 '무량억겁'처럼 예사로이 사용하는 불교의 세계관은 은빛 성문 너머의 세계와 통한다.
의상 조사가 화엄경을 210자로 요약한 <법성게>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구세십세호상즉/잉불잡란격별성/초발심시변정각/생사열반상공화. 아홉 개에 하나를 더해 열 개의 세계는 따로따로 존재하면서도 혼란 없이 서로 함께 조화를 이루고, 깨달음을 얻겠다고 처음 결심한 때가 곧 깨달음을 이룬 때며, 생사와 생사를 뛰어넘은 열반은 함께 이루어진다,라고 풀이된다. (구세십세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또 각각 과거, 현재, 미래를 구성하고 있어서 3X3=9, 여기에 마음의 시간이 합해져 열개의 세계가 된다는 뜻이다.) 깊은 뜻은 짐작도 못하겠지만, 시간을 초월한 거대한 세계라는 게 있다는 얘기임은 막연히 알겠다. 그 거대한 세계에서, 마치 은하처럼, 빛의 추가 천천히 돌아가며 꽃들을 피우고 시들게 하는 세계, 모모의 마음속 세계가 빛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놀랍다. 모모의 작은 몸 안에 거대한 순금 지붕의 방이 들어 있는 신비, 우리의 작은 몸 안에 무량억겁의 세계가 들어있는 신비는 가능한 것인가.
시선을 당겨 이제 내 자리로 돌아와서 내 시간을 본다. 호라 박사는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고 가슴으로 느끼지 않는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린다고 했다. 가슴으로 느끼는 시간이라니. 너무 추상적인 말이어서 어렵다. 그렇다면 회색 신사의 도움을 받아볼까? 회색 신사가 이발사 푸지 씨에게 가차 없이 빼라고 했던 항목들을 보자: 여덟 시간 정도의 잠, 하루 세끼의 식사, 귀가 어두운 어머니 곁에 앉아 이야기하기, 앵무새를 보살피는 십오 분, 시장을 보고 구두를 닦는 등의 집안일,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다리아 양의 집에 꽃을 들고 찾아가 그녀를 만나는 삼십 분,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십오 분 동안 창가에 앉아 그날 하루를 생각하는 습관. 내 시간에서 뭘 빼야 할지 회색 신사에게 물어보고 그걸 빼지 말아 볼까?
엔데는 동화작가로 불리고 <모모>는 동화 같다. 동화는 종종 무시를 당하지만 잘 쓴 동화는 나이를 초월한다. 옛이야기도 그렇고 민담도 그렇다. 그런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어린아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어린 시절은 완벽한 세계와 가장 가까이 있다는 뜻일까? 페터 한트케의 시를 읽으며, 탄성이 나왔다. 특히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라는 행에서. 시를 다시 찾아서 읽어보니 내가 '완벽한 인생'을 '완벽한 세계'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탄성이 나왔다. 내가 꿈꾸는 건 완벽한 '세계'라는 각성 때문에. 아이는 이 완벽한 세계, 불가해한 미지의 세계에서 갓 태어난 존재이고, 그래서 여리고 희고 맑고 깨끗하다. 우리가 귀여운 어린아이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그 완벽했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 때문이리라.
페터 한트게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도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사진 찍을 때도 억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 아래 살고 있는 것이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조각은 아닐까?
악마는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일뿐인데 그것이 나일 수 있을까
아이가 아이였을 때
시금치와 콩, 양배추를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잘 먹는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낯선 침대에서 잠을 깼다
그리고 지금은 항상 그렇다
옛날에는 인간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옛날에는 천국이 확실하게 보였지만
지금은 상상만 한다
허무 따위는 생각 안 했지만
지금은 허무에 눌려 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아이는 놀이에 열중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열중하는 것은 일에 쫓길 뿐이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사과와 빵만 먹고도 충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딸기만 손에 꼭 쥐었다
지금도 그렇다
덜 익은 호두를 먹으면
떨떠름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산에 오를 땐 더 높은 산을 동경했고
도시에 갈 때는 더 큰 도시를 동경했는데 지금도 역시 그렇다
버찌를 따러 높은 나무에 오르면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도 그렇다
어릴 땐 낯을 가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항상 첫눈을 기다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를 창 삼아서 나무에 던지곤 했는데
창은 아직도 꽂혀 있다.
지금까지 저와 함께 모모의 세계를 방문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이 연재글을 사랑하는 나의 모모, 종우에게 바칩니다.
* 페터 한트케의 시는 브런치 베리티작가님의 글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작가님께 감사합니다.
* 미하엘 엔데의 말과 글은 <끝없는 이야기>의 '옮긴이 말'에서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