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라면 실감할 테고 독자 역시 육감적으로 아는 사실이 있다. 모름지기 소설은 첫 단락 특히 첫 문장이 중요하다는 것. 작가는 혹은 이야기꾼은 낚싯꾼이 물고기를 낚아채듯 첫 문장으로 자신의 잠재적 독자들을 단번에 낚아챌 수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계속해서 읽히느냐 아니냐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물론 경험 많은 독자라면 진짜배기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서는 심심한 첫 단락을 용인하며 참을성 있게 계속 읽어야 할 사례도 많다는 걸 알 테지만 말이다.)
멋진 서두는 가령 이럴 수 있다:
<톰 소여의 모험>이라는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 나에 대해 잘 모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 책을 쓴 사람은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인데 대체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좀 뻥 튀겨 말한 대목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진실을 적고 잇는 셈이지요.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나는 여태껏 한두 번 거짓말을 안 해 본 사람을 본 일이 없답니다. 모르긴 해도 거짓말을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이라면 폴리 아줌마나 과부댁 또는 아마 메리 정도일 거라구요. 폴리 아줌마랑 - 톰의 아줌마 폴리 말이지요 - 메리랑 더글러스 과부댁 이야기는 그 책에 다 적혀 있습니다. 방금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얼마간 뻥튀기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진실을 적어놓은 책이지요. <허클베리 핀의 모험>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몇 년 전 - 정확히 언제인지 아무래도 좋다 - 지갑은 거의 바닥이 났고 또 뭍에는 딱히 흥미를 끄는 것이 없었으므로,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내가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 늘 쓰는 방법이다. 입 언저리가 일그러질 때, 이슬비 내리는 11월처럼 내 영혼이 을씨년스러워질 때, 관을 파는 각계 앞에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추거나 장례 행렬을 만나 그 행렬 끝에 붙어서 따라갈 때, 특히 심기증에 짓눌린 나머지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의 모자를 보는 족족 후려쳐 날려 보내지 않으려면 대단한 자제심이 필요할 때, 그럴 때면 나는 되도록 빨리 바다로 나가야 할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에게는 권총과 총알 대신이다. 카토는 철학적 미사여구를 뇌까리면서 칼 위에 몸을 던졌지만, 나는 조용히 배를 타러 간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다를 알기만 하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는 바다에 대해 나와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될 것이다. <모비딕>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독신의 남자는 아내가 필요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다들 인정하는 진리입니다. 이러한 진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으므로, 이런 남자가 어떤 동네에 이사를 오면, 그 남자가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고 해도, 동네 사람들은 그 남자를 자기 딸자식이 차지하기에 마땅한 재산으로 여깁니다. <오만과 편견>
첫 문장의 중요성은 판타지소설의 경우 더 강조되야 할 것 같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가짜인데, 정말 진짜 같은 가짜랍니다, 하는 선언이 이 대목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독자로 하여금 자진해서 이야기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 첫 발을 서슴없이 들여놓게 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우리가 현실감을 놓기란 망설여진다. 한편으로는 비겁하게 도망치는 느낌,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에. 그래서 판타지를 창조하는 사람은 믿음직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이상한 데로 끌고 가지 않으리라는 믿음, 허구의 이야기로 진실을 만나게 해 주리란 믿음을 줄 수 있어야 독자는 안심하고 이 가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진실은 비유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마치 태양을 맨눈으로 볼 수 없듯이.
<모모>는 사람들이 아주 다른 말을 쓰던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 따뜻한 나라들에는 크고 화려한 도시들이 세워져 있었다로 시작된다. 마치 옛날이야기를 하듯이 소설을 시작하는데, 이 문장에서부터 독자들을 현실로부터 살짝 떼어놓는 느낌이 난다. 딱딱하고 차고 적대적인 현실로부터 폭신하고 따뜻하고 환대하는 세계로의 초대장을 받는 느낌. 초대장은 강렬한 유혹을 일으킨다. 그래서 다음 문장들을 조심스레 더 읽어 내려가게 된다.
사람들이 아주 다른 말을 쓰던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 따뜻한 나라들에는 크고 화려한 도시들이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는 왕이 사는 궁전이 우뚝 서 있고, 넓은 도로와 좁은 길과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있었다. 황금과 대리석으로 조각된 신의 상이 서 있는 웅장한 사원도 있고, 세계 곳곳의 왕국에서 들여온 온갖 다채로운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시장도 있었으며, 사람들이 새로운 일을 이야기하고, 연설을 하거나 듣기 위해 모였던 넓고 아름다운 광장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에는 극장이 있었다.
그 극장들은 오늘날의 서커스장과 비슷하지만, 커다란 돌로만 지어져 있다는 점은 달랐다. 관객이 앉은 좌석은 거대한 깔때기처럼 겹겹이 계단식으로 꾸며졌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 극장들은 둥그런 원 모양도 있고, 갸름한 타원형 모양도 있고, 커다란 반원 모양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 극장을 원형극장이라 불렀다.
그중에는 축구 경기장만큼 커다란 것도 있고, 겨우 몇백 명의 관객에게 어울리는 자그마한 극장도 있었다. 또 둥근 기둥과 조각들로 꾸며진 화려한 극장이 있는가 하면, 아무 장식도 없는 소박한 극장도 있었다. 이 원형극장들에는 지붕이 없었다. 모든 행사는 탁 트인 하늘 아래서 열렸다. 그래서 화려한 극장에는 관객들이 뜨거운 햇볕이나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낙비 때문에 고생하는 일이 없도록, 좌석 위에 금실로 짠 융단을 높다랗게 쳐 놓았다. 소박한 극장에서는 갈대와 짚으로 짠 차일이 그 구실을 했다. 한마디로 극장들은 사람들의 형편에 맞게 꾸며졌다. 하지만 모두들 극장을 갖고 싶어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열정적인 청중이요 관객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잠자리에서 엄마나 아빠가 읽어주는 옛날이야기를 듣듯이 독자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은 옛날이라는 시간대에서 훌쩍 시간을 건너뛰어 현대로 넘어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 후로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옛날의 커다란 도시들은 몰락했고, 사원과 궁전들은 무너져 버렸다. 비바람과 추위와 뜨거운 햇볕으로, 돌덩이들은 깎이고 구멍이 뚫렸다. 커다란 극장들도 세월의 풍파에 시달려 폐허만이 남았다. 여기저기 어지럽게 금이 간 담벽 틈새에서는, 지금은 여치들만이 잠든 대지의 숨결처럼 들리는 단조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 커다란 옛 도시 가운데에는 오늘날까지 커다란 대도시로 남아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 물론 그 안의 삶은 아주 딴판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동차와 전철을 타고 다니고, 전화와 전등을 쓴다. 하지만 새 건물들 사이에는 아직도 군데군데 둥근 기둥들, 성문, 무너진 담모퉁이 한 자락, 저 옛날의 원형극장 터가 남아 있다.
바로 그런 도시에서 모모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으면 내가 이 책을 읽는 지금을 말하나? 독자는 추측하면서도 자신할 수 없다. 원형극장 터가 남아있는 도시라고 해봤자 그리스, 로마 정도를 떠올리지만 작가는 구체적 지명에 대한 정보는 전혀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걸 확인하려면 다음 문장을 읽는 수밖에. 독자는 이미 작가에게 낚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