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
"오늘 제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지난 시간 네가 그랬지. 연산 문제를 풀면서 울먹였어. 무슨 일일까, 나는 캐묻지 않았어. (물었어야 했을까? 나는 자주 망설여, 물음과 침묵 중에서 무엇이 좋은 선택일지. 물었어야 할 순간에 침묵하고 침묵해야 할 순간에 묻는 실수를 그리 많이 했으면서도 아직까지 잘 모르겠구나.)
아무튼 그때는 수학문제집을 덮고 그림책을 꺼냈지. 단번에 우리가 행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 말이야. 그 안의 세계는 단순하고 선명하며 선의와 사랑으로 가득했어. 그 세상이 네가 사는 이 현실과 다를지라도 잠시 현실을 떠나는 것도 나쁘진 않았어. 두 겉표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십 장, 서른 장의 그림과 글이 열어주는 무한하게 열린 공간 속으로 자유롭게 날아가 숨을 쉬는 것도.
너를 위해 다음에 무슨 책을 가져갈까, 궁리했어. 너의 슬픔을 위로해 줄 책이 뭘까.
이 책의 주인공인 김 군은 1700년대 조선에서 살았던 김덕형이라는 사람이라고 해. 화가였고 꽃을 사랑해서 꽃 그림을 많이 그렸나 봐. 이 사람에 대한 기록도, 그가 그렸다는 그림도 찾을 수 없어서 전해지는 이야기만 남았는데 김동성 작가가 이 사람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책을 만들었어.
마당이 온통 꽃이다. 사람들은 담 너머로 김 군을 보고 있네. 뭐라고 했을까? 꽃에 미쳤군, 미쳤어. 혀를 끌끌 찼을까?
하지만 김 군은 행복하기만 한 걸. 꽃 속에서 황홀해하고 있는 걸. 꽃의 부드러운 촉감, 오묘한 빛깔, 섬세한 꽃향기 속에서 김 군은 기쁨과 평화를 느꼈을 거야. 바람이 몸을 감싸고돌고, 햇빛이 머리를 따뜻하게 데우고, 디디고 선 흙은 부드러웠겠지. 흙냄새가 올라오는 흙!
하지만 미쳤다는 제목은 좀 불만이야. 그건 미친 게 아니라 '사랑'이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온 마음을 줄 때 주변 사람들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아. 그 순간이 단 몇 초에 불과하더라도 말이야. 이 아름다운 그림책을 펼쳤을 때 우리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김 군을 만나고 김 군과 같이 꽃 속에서 편안하고 평화롭고 행복해.
샐리, 슬플 때, 이 슬픔을 어쩌나 싶을 때, 위로가 필요할 때, 혹은 막막할 때, 잠시 슬픔을 곁에 놓아두고 떠나는 것도 괜찮아. 아름다움이라는 부드럽고 화사하며 고운 이불로 마음을 덮어주는 것도. 이 아름다운 그림들로,이 그림들을 그리고 있었을 때 화가의 마음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걸 그리는 순간에 화가의 눈과 마음에 어떻게 나쁘고 거친 기운이 있겠니.) 부드러운 이불을 덮고 잠시 단잠을 자고 나면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고 다시 힘이 나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움으로 너를 덮어보지 않으련.
그림에 선량한 기운이 한가득이다.
* 인용한 그림들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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