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들른이 Mar 21. 2020

등교 연습

아빠와 딸, 둘 만의 시간

'사상 초유의 4월 개학!'


코로나 사태로 인한 휴교령에 우리 집안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것은 애들 보느라 힘든 할머니도, 육아와 일에 버거운 아빠와 엄마도 아닌 바로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아이였다. 입학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으로 두근 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던 딸아이는 또 한 번의 입학 연기에 큰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눈이 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아이는 요즘 등교 준비 연습에 한창이다. 입학 전에 새로운 아침 패턴을 하나하나 새로이 몸에 익히 중이었다. 기상과 함께 습관적으로 틀던 텔레비전 대신에 세수를 먼저 했고, 할머니가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오늘 입을 옷을 스스로 골랐다. 가방을 챙기는 법을 배웠고, 평소 텔레비전 시청과 수다를 동시에 하느라 1시간을 잡아먹던 아침식사를 20분 이내로 줄이고자 했다. 중간에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딸아이는 이제 자신은 초등학생이라는 사명감에 꿋꿋이 그 험하고 고된 시간을 버텨왔다. 그런 딸아이에게 입학 연기는 큰 상실감이었음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았다.




런 딸을 위해 아빠는 큰 맘먹고 시차근무제를 신청하였다. 모든 학교가 코로나 때문에 쉬는 데 웬 시차근무제냐는 상사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애를 먹긴 했지만, 어차피 딸의 등교와 아들의 등원을 할머니 혼자 감당하긴 어려웠기에 언젠가는 필요한 일이었다. 그저 시기를 조금 앞당겼을 뿐이었다.


그렇게 아빠와 딸의 '등교 연습' 시작됐다. 


실제 등교할 때와 같은 시간에, 딸 스스로 길을 찾아, 학교 교문 앞까지 다녀오는 연습이었다. 앞서 걷는 딸의 발걸음엔 주체할 수 없는 흥분과 즐거움이 담겨있었다. 가는 길 내내 자신보다 아빠가 앞서지 못하게 막으며 자신이 잘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애썼다. 가끔 갈림길에서 헷갈려할 때도 아빠는 차분히 기다려 주었고 한 번쯤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서도 문제없다 말해주었다. 어차피 아빠가 옆에 있는 데 뭐 어떠하리.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이제 딸은 학교로 가는 모든 길을 외운다. 정문으로 가는 길과 후문으로 가는 길 모두를 말이다. 딸 아이의 의기양양한 표정에 아빠는 웃음을 지을 뿐이다.


등교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러 사탕을 하나씩 사는 재미도 생겼다. 사탕을 고르며 '내일은 젤리 사줘~알았지?' 하며 다짐을 받으려는 딸이 기가 차면서도 해맑아 이쁘다. 게다가 항상 동생 것 까지 챙겨주니 대견할 수 밖에.


한 발 더 나아가 오늘 아침엔 등교 길에 부대에서 업무 준비를 하는 엄마와의 영상통화를 하며 걷는 재미도 추가되었다. 딸은 휴대폰 너머 엄마에게 그 짧은 시간에 쉴 새 없이 자기 할 말을 쏟아낸다. 어젯밤에 통화하고도 뭘 그리 하룻밤만에 할 이야기가 많은지. 


등교 연습 후에 아빠가 출근을 위해 나서면 딸은 매일 같이 묻곤 한다.

 

"아빠 내일도 또 등교 연습해 줄 거지?"

"그럼~ 당연하지! 등교 연습하는 거 좋아?"

"응 좋아! 매~일 매~일 하고 싶어!"


이건 아마도 일전에 전날의 과음으로 등교연습을 걸렀던 전적 때문일 것이다. 한 번 등교연습을 걸렀다가 딸에게 호되게 혼이 났었다. 배신감 가득한 눈망울을 앞에 두고 아빠는 미안하다고 지문이 닳도록 손발을 싹싹 빌수 밖에 없었다. 다음 날 등교 연습을 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기분을 푸는 딸을 보며 어떤 일이 있어도 등교연습을 거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등교 연습을 하면서 힘찬 발걸음으로 앞서 걷는 딸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에서 한 번씩 다가오는 변화와 성장의 시기를 잘 넘어가는 것 같아 아빠는 그저 대견할 뿐이다. 학교에 가면 자신이 가장 작고, 안 이쁘고, 언니 오빠들이 괴롭히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도(대체 누가 이런 걸 가르친 건지...) 이 모든 상황을 즐기는 딸이 고맙다.


국가 위기에 할 말은 아니지만 우연찮게 생긴 연습 기간은 아빠와 딸 둘만의 기억으로 남아 유대감을 더욱 짙게 만들어 주었다. 아빠는 딸의 인생에서, 딸은 아빠의 인생에서 고난을 함께 이겨낸 유일무이한 동지가 되었다. 인생을 살면서 겪을 수 있어서 감사한 그런 시간이었다. 


아빠는 오늘도 등교하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응원한다.

 



이전 03화 장난꾸러기 아들의 생존비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