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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른이 Mar 29. 2020

한 잔 하고 싶은 날

자신의 바닥을 잠시 마주친 그런 날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혼자서...... 술 한잔 마시고 싶은.

그런 날은 유독 의욕이 떨어진다. 


모든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생각은 자꾸 안으로만 깊이 가라앉는다. 마음의 무게로 짓눌린 몸은 불과 한 번의 호흡도 한 걸음 내딛기도 벅차다. 초점을 잃은 공허한 눈빛은 향할 곳을 찾지 못한다. 회사에서의 비전도, 인생의 성공도, 가족의 행복도 부질없이 느껴진다. 당장이라도 이 현실에서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다. 하지만 결국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정처 없이 헤매다 주저앉는다.


그런 날은 대화도 하고 싶지 않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말은 목 밑을 겉돌다 한 숨만 남긴 채 삼켜진다. 들리는 것은 귓가에 맴돌다 처마 밑 빗물처럼 튕겨 나간다. 상사의 질책도, 동료의 응원도, 가족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두터운 벽을 온몸에 꽁꽁 두르고 철저히 가라앉는다. 



그런 날은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벗어나기 위해서, 습관처럼 술을 찾게 된다. 침전되는 자신을 벗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해 몸이 기억하는 유일한 방법인 술에 의탁할 수밖에 없다. 취기로 우울감을 씻어내기 위해 그리고 외로움과 무기력에서 도망치기 위해 술은 나쁘지 않은 수단이다. 평소에 잘 찾지 않는 술이지만, 아니 오히려 자주 먹지 않는 술이기에 이런 날은 마신다.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초조함에 빈 잔을 견디지 못하고 급하게 털어 넣는다.


그런 날은 혼자서 마셔야 한다.


이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상대방의 하소연까지 들어줄 여력이 없다. 이런 날은 차라리 필사적으로 관계에서 도망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내면에 숨어버린 '나'를 마주하고, 우울감을 곱씹으며 혼자 한잔 마시는 것이 훨씬 편하다.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혼자서.



술잔에 비친 모습을 보며 두 가지 질문을 되새긴다.


' 왜 이렇게 살지?'
' 어떻게 살아야 하지?'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공허한 외침을 견디기 힘들기에 머릿속 팔레트의 모든 물감을 뒤섞어 검은색으로 머릿속을 가득 덧칠한다.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 경제적 압박, 치열한 경쟁, 낙오의 패배감, 쉴틈 없는 일과, 엉망진창인 업무, 보상 없는 성과, 맥락 없는 인사, 고압적인 상사, 이기적인 동료, 별세계에서 온 후배, 쳇바퀴 돌 듯 기계적인 하루, 보람 없는 노력, 잃어버린 꿈, 채워지지 않는 욕구 등 모든 감정과 생각을 덕지덕지 검은색 속에 묻어버린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검은색에 뒤섞인 감정들은 눈물처럼 흘러내리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마음은 편해진다. 왠지 저 어둠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여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것만 같다. 그리고 술기운에 몸을 의탁하여 어둠 속에서 시선을 돌려 애써 무시한다. 내일은 좀 더 내 하루에 행운이 가득할 것을 내심 기대하면서.

몸도 마음도 바닥을 치는 그런 날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혼자서 술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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