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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른이 Oct 01. 2019

아내가 진급에서 누락한 날

아내가 진급에서 누락됐다.


작년 진급 누락 이후 지난 일 년간 얼마나 열심히 근무했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봤기에 아내가 받을 상처가 걱정되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군인이라는 직업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알기에 아내가 느낄 실망감과 허탈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군인이라는 직업 자체가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모든 젊음을 군에서 불태웠던 아내에게 진급 누락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급 누락 후 한 달여 동안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을 해도 그저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군의 진급 체계는 일반 직장인인 내 입장에선 가혹하기 짝이 없다. 일단 진급 누락이 퇴직으로 이어지는 것 자체가 그렇다.  진급이 안되면 나가야 하다니...... 이건 마치 장기 계약직 같지 않은가. 사람들은 군 장교가 굉장히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생각보다 당사자들은 꽤 이 부분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 같다. 게다가 진급을 위해선 보직 수, 근무경력, 포상실적, 평정, TO 등 정말 많은 것을 챙겨야 하고, 그만큼 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운도 크게 작용을 한다. 정말 극도로 치열한 경쟁 체제가 아닐 수 없다. 옆에서 지켜볼수록 군 장교는 직업의 안정성을 담보로 일에 영혼을 갈아 넣도록 부추기는 굉장히 힘든 인사제도를 운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아내의 진급 누락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가정' 자체가 아내의 진급에 마이너스가 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남성 중심의 조직에서(설령 여성끼리 진급을 놓고 경쟁한다 해도) 결혼과 출산, 육아휴직은 경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야근도 맘 편히 하지 못하고, 퇴근하면 아이들을 챙기기 위해 급하게 집으로 복귀하고, 집안의 대소사로 아이와 남편 그리고 시댁을 하나하나 챙기며, 회식 한번, 술자리 한번 편히 가지기 어려웠을 아내가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경쟁하기는 녹록지 않았을 터였다. 결정적으로 아이들을 잘 키우겠다는 마음으로 진급에 중요한 시기에 육아휴직을 낸 것이 확실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 아내를 뭐 하나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고 각자 사는 게 바빠 신경 써주지 못했음에 더욱 미안해졌다.


그럼에도 이 가정조차 자신의 선택이었다며 후회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아내가 멋있고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내가 회사 생활을 하며 본 어느 누구보다도 능력이 있고, 영민하며 현명한 사람이었기에 이 가정에 발목이 잡혀, 여성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는 것이 아쉽고 또 아쉬웠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녹록지 않은 현실이 우리 딸에게도 이어질 것 같아 착잡하다.
 

진급 발표 후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늦은 밤, 부대에서 의연하게 일하고 나서 퇴근 후 혼자서 소파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그런 아내를 보고 있자니 먹먹함과 미안함 그리고 분노가 뒤섞여 올라왔지만, 그럼에도 그 상황 속에서 안아서 등을 토닥여 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제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아내는 그동안 인생의 한 부분이었던 군인이라는 직업을 뒤로하고 새로운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삶이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가 없기에 설레면서도 두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아내에게 이 가정이 그동안 짐이 됐었다면, 앞으로의 새로운 인생 속에선 아내가 아내답게, 당당하게, 후회가 남지 않도록 도전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 그리고 치열한 생의 전투 속에서 돌아왔을 때, 나와 아이들이 이 가정이 그 사람에게 위로와 위안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남은 시간 아내가 후회 없이  군 생활을 마무리하고 찬란한 미래를 이어나가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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