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인은 술꾼 멤버들 사이에서 암호가 있는데 그 말을 하면 다들 알아듣는다고 한다. 바로 '약 먹으러 가자 '란다. 여기서 약이란 다슬기탕을 말한다. 다슬기탕을 먹으면 해장은 물론 속이 시원해져서 마치 약을 먹고 치료받은 것 같단다.
실제로 다슬기는 선사시대 유적지에서도 발견되었을 정도로 오랫동안 먹어왔던 식재료이기도 하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활동한 의학자 김일훈이 저술한 <신약본초(神藥本草)>에서는 '간과 쓸개를 구성하는 청(靑) 색소가 부족할 때 간, 쓸개질환이 발생하는데, 그 청색소가 민물고둥(다슬기)에 담겨 있다'라고 쓰여 있다.
다슬기는 숙취의 원인인 아세트알데히드라는 독성물질을 빠르게 분해하여 숙취해소에 도움을 준다. 한편 저지방, 고단백식품에 칼슘 같은 미네랄도 풍부해 다이어트나 성장기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식재료이다. 술꾼들이 술만 잘 아는 것이 아니라 해장국에 쓰이는 식재료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다. 몸소 체험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나의 외갓집은 완주군 운주면이다. 그곳은 지금도 여름휴가철 물놀이와 다슬기잡이로 유명한 곳이다. 외갓집 식구들은 다슬기라고 부르지 않고, '대수리'라고 불렀다. 다슬기 서식지가 전국구이니 지역에 따라 이름이 다를 수밖에 없다. 충남에서는 '고동'이나 '올갱이'이라 하고, 경남지역은 '고둥', 강원도는 '꼴팽이', '달팽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경상도는 '고디', '고동'이라고 부른다.
얼핏 보면 달팽이와 비슷해 보이지만 암수 구분이 있어 달팽이와는 다르다고 한다. 어릴 적에는 물속에 사는 달팽이와 다슬기가 헷갈려서 구분 없이 잡기도 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다슬기의 종류는 9종이고, 서식지에 따라 맛이 각기 다르다고 한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임실 면에서 잡히는 다슬기는 뒷맛이 달달한데, 운주면에서 잡히는 다슬기는 씁쓸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약이 되는지도 모르겠다고 하신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니 참고만 하시기를...
충북 괴산에서는 매해 여름에 올갱이 잡기, 올갱이 까먹기 대회, 올갱이 전 만들기 등 올갱이를 주제로 한 올갱이 축제가 열리기도 할 정도로 다슬기가 유명하다. 경북 청송에서도 다슬기 줍기 체험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청송은 사과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다슬기도 유명하다. 강원도 철원에도 '화강 다슬기 축제'가 있다. 2019년 이후 축제 흔적이 안 보이기는 하지만 전남 순천의 '주암 다슬기 축제'도 있고, 전북 임실군의 '섬진강 다슬기 축제'도 있다. 전북 장수군은 올해 처음 "천천면 금강 다슬기 축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중 제일 오래되고 큰 축제는 철원에서 열리는 다슬기 축제이다. 내년 8월에 철원의 다슬기 축제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
난장은 어렸을 적 난장이라고 불러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장날 외에 부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이라고 한다. 또 난장판이 여기에서 온 단어이기도 하단다. 이 난장이 지금의 축제로 확대되어 넘어온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예전에 전주에서 축제 비슷한 난장이 열리고는 했었다 이곳에 가면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번데기와 다슬기, 소라 등을 삶아서 컵에 팔기도 했다. 물론 술안주용이었을 것이다. 내가 중학교까지는 난장이 자주 열렸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축제로 바뀌었다. 마침 집 근처에서 난장이 열려서 오며 가며 둘러보던 어린 시절의 추억거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먹성이 좋았던 우리 가족은 육류뿐만 아니라 해산물류도 무척 좋아했다. 내 기억에는 얼리거나 말리거나 소금에 절인 생선류는 시장에서 쉽게 볼 수 있었지만, 횟집에서 먹는 것 같은 신선한 해산물류는 난장에서 주로 봤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내가 큰딸에, 고명딸이어서 그랬는지 어른들이 갈법한 곳에 종종 나를 동행해서 가시고는 하셨다.
그 어느 날 난장의 포장마차에서 아버지가 피조개를 사주신 적이 있다. 나는 고기는 안 먹었지만, 해산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엄청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난장을 지나갈 때마다 그날의 피조개가 너무 먹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다시는 아버지와 함께 난장에 동행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나의 음식에 대한 사랑은 집요하기까지 했던 것 같다. 엄청나게 큰 피조개 한 개가 500원이었던 같은데, 용돈을 모아 결국 난장 안에 있는 포장마차에 가서 그 피조개를 사 먹었다. 중학생 시절에는 딱히 용돈이라는 게 없어서 이래저래 돈을 모으느라 애가 탔었던 기억이 난다. 피조개를 먹겠다는 일념 하나로 돈을 모아 결국 실행에 옮긴 것이다.
당연히 그때의 피조개 맛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약간은 비릿한 해산물 특유의 향과 물컹거림과 쫄깃함이 조화를 이루는 그 맛을 어찌 잊으랴. 다행히 피조개가 상당히 커 반을 잘라 주셔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었다.
다시 다슬기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내가 어린 시절에는 냇가에 물놀이 겸, 물고기잡이, 다슬기잡이를 많이 했었다. 딱히 놀이 공원 같은 곳이 많은 시절이 아니니 여름이면 다들 가까운 물가에 놀러 갔으리라. 나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오면서 남녀가 분리된 여자 중학교에 다녔다. 슬슬 사춘기가 다가오던 그 무렵 초등학교 때 한 반이었고, 인기남이었던 신**이라는 친구를 튜브를 타고 놀다가 딱 마주쳤다. 튜브를 마주하고 선 모습이라니. 뭔가 어색함에 서로 눈인사만 하고 각자 다른 구역으로 가서 조용히 물놀이를 했다. 나에겐 나름 충격적인 기억이라 그 친구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시절 어머니들의 친화력은 정말 초고속 충전기 못지않았다. 한참을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는데, 엄마가 수박을 먹으라며 불러댔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그 친구와 친구의 어머니와 우리 가족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닌가. 차마 부끄러워 못 간다고 말하지 못하고 다슬기가 많아서 잡아야 한다며 거절했다. 남녀의 차이를 알아가던 시절 수영복 차림으로 초등학교 동창을 마주하는 일이 쉽지 않은 때였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여름에 다슬기잡이는 놀이를 떠나서 일상 같기도 하다. 해마다 다슬기를 잡으러 다녔으니 말이다. 어른들은 물안경 같은 것을 눈에 대고 거침없이 다슬기를 잡았다.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나도 저 물안경이 있으면 더 잘 잡을 것 같은데, 왜 나는 저 물안경을 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긴 다슬기가 많던 곳에는 돌도 미끄덩거렸던 것 같다. 그래서 물속을 걷다가도 첨벙 빠지고, 돌을 뒤집다가도 첨벙 빠지던 나에게 물안경은 어쩌면 무용지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다슬기를 잡은 날에는 다슬기탕은 물론 다슬기 수제비도 푸짐하게 먹었다. 이 맛있는 다슬기탕을 위해 온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바늘로 다슬기를 돌려 빼고는 했다. 다슬기가 껍질에서 잘 분리되게 하려면 나름의 요령이 필요하다. 먼저 다슬기를 삶을 때 다슬기가 껍질에서 나온 순간에 뜨거운 물에 부어야 한다. 두 번째로 껍질에서 돌려 뺄 때는 힘을 주어 잡아당기면 중간에 끊어지니 살살 돌려가면서 빼줘야 한다. 리듬에 맞춰가며 빼야 잘 분리할 수 있는 것이다.
집에 작은 냉동고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다슬기를 얼려두었다가 가을이 제철인 아욱이 나오면 된장 푼 아욱국에 감자와 다슬기를 넣어 국을 끓여 주시기도 했다. 아주 가끔은 이 국에 수제비를 띄워 주시기도 했다. 수제비, 칼국수 같은 밀가루 음식을 좋아했던 엄마의 개인 취향이기도 했지만, 내가 잡은 다슬 기라서인지 순식간에 한 그릇 뚝딱 비워내고는 했다. 지금은 다들 밀가루 음식을 자제하느라 순수 다슬기국이나 아욱국으로만 먹지만 가끔은 추억의 그 맛을 생각하며 수제비를 띄우기도 한다.
아버지는 간장과 된장을 넣고 끓인 물에 다슬기를 넣고 마늘과 청양고추를 넣은 다슬기 장을 무척 좋아하셨다. 어느새 주부가 된 내가 끓여 준 다슬기 장을 엄마가 끓인 것보다 맛있다며 해마다 특별 주문을 하시고는 하셨다. 이제는 내가 너무 바빠져 아버지에게 다슬기 장을 끓여드리지를 못하고 있다. 다슬기가 너무 귀해졌다. 중국산이 많아져서 구분하기 힘들다 등의 핑계 같지 않은 핑계를 바쁘다는 말 대신 내세우기도 했다.
글을 쓰다 보니 지난날들을 뒤돌아보게 된다. 아버지와 다시는 난장을 가지 못해 아쉬웠던 그 마음을 아버지에게 되돌려 드릴 수는 없는 일이다. 내년 8월에는 다슬기 축제에서 가서 가장 신선한 다슬기를 사서 매콤하고 짭짤한 나만의 다슬기 장을 아버지에게 담아드려야겠다.
다슬기해장국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게 끓이는데, 강원도와 충북에서는 부추와 어린 배춧잎이나 아욱을 넣고 고춧가루, 다진 파, 마늘, 소금 등을 넣고 끓인다. 경남과 전북에서는 다슬기 삶은 물에 다슬기와 부추, 호박잎, 애호박, 매콤한 풋고추 등을 넣어 끓인다. 경상도는 다슬기 삶은 물에 다슬기와 데친 배추와 부추 등을 넣고, 들깻가루, 쌀가루를 넣어 끓인다고 한다. 사실 나는 전북이나 경남지역의 다슬기해장국을 많이 먹어서인지 아무래도 맑고 시원한 국물에 익숙하다.
전주에도 맛 좋은 다슬기 해장국집이 꽤 있지만, 제대로 먹고 싶을 때면 임실 강진면으로 달려간다. 내가 자주 가는 곳은 두 군데인데 각기 다른 매력이 있어 같이 가는 이의 취향에 따라 고르기도 하고, 그날 나의 기분에 따라 고르기도 한다. 사실 임실에 있는 다슬기탕 식당들은 어느 곳을 가도 웬만큼은 다 입맛에 맞다.
최근에 내가 즐겨 가는 곳은 깔끔한 밑반찬은 기본이고 다슬기탕은 더할 나위 없이 맛있으며, 곁들여 주시는 조밥이 너무 맛있는 기사식당이다. 분명 기사식당이건만 기사분들은 좀처럼 볼 수 없고 일반인들만 가득하다.
술꾼들은 음주 후 약으로 먹는다는 다슬기 해장국을 나는 어릴 적 추억을 되새기며 먹는다. 냇가에 흔하고(점점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채취할 수 있어 잡는 재미, 빼먹는 재미가 쏠쏠한 다슬기는 너무나 매력적인 식재료이다. 게다가 정말로 약성을 지니고 있으니 이토록 훌륭할 수 없다.
브라보(bravo) 다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