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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썬맨 Oct 24. 2021

역시 최고의 언어는 손짓 발짓

시베리아횡단열차(1일차) 

감사와 고난은 함께 찾아온다고 했던가. 열차를 타고 출발하자마자 아내에게 고통이 찾아왔다. 한 달에 한번 걸리는 마법 통이 찾아온 것이다. 아내는 평소에서 몸이차고 생리통이 심한 편이다. 특히나 첫째 날이면 하루 종일 끙끙 앓곤 했는데 횡단 열차의 설렘을 만끽할 틈도 없이 하루 종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화장실을 자꾸 다녀올 수밖에 없는 상황.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혈액순환이 잘될 수 있도록 이불을 덮어주고, 팔다리를 주물러 주는 것 밖에 없다. 


아내가 또 화장실에 갔다. 앞자리에 앉은 마리나 아줌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러시아말로 뭐라고 하셨다. 


“네? 죄송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번역기를 검색해가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답을 해주었다. 잠시 머뭇하시더니 이윽고 배를 둥글게 만들며 바디랭귀지와 함께 아픈 표정을 짓는 아줌마. 마치 스피드 퀴즈를 풀듯이 재빨리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봤다. 임신했냐고 묻는 것 같았다. 


“노노노, 아니에요.”

머리 색깔과 눈 색깔만 다를 뿐이지 한국 아줌마들처럼 러시아 아줌마들도 정이 많은 것 같다. 다들 아까부터 관심이 있었다는 듯 삼삼오오 내 주변으로 몰려들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만난 지 하루 만에 횡단 열차 자체 반상회가 열렸다. 말은 안 통해도 의미는 다 통한다. 나는 마리나 아줌마의 임신했냐는 바디랭귀지에 맞서 휴대폰에 있는 달력을 보여주며 한 달을 뜻하는 숫자 1을 손가락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배를 만지며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아프다는 표시를 했다. 과연 잘 전달되었을까?


이윽고 나의 바디랭귀지를 분석하기 위한 아줌마들끼리의 긴급회의가 개최되었다. 무슨 말인지 인해했다는 듯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회의가 결과가 나온듯하다. 마리나 아줌마는 살구같이 생긴 과일을 꺼내며 비타민C를 먹어야 해!라고 말했고, 다른 아줌마는 이거는 내가 먹는 진통제인데 효과가 아주 좋아하시며 두 알의 약을 건네셨다. 바나나를 주시는 분도 있고 무려 손바닥만 한 방울토마토를 주시는 분도 있었다. 마치 자기 자녀라도 되는 듯 이방에서 온 우리에게 다들 식구 챙기듯 자신의 것들을 조금씩 나누어 주셨다. 


기차 안에서 병원도 갈 수없고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한 마음이 있었는데 가슴속이 따뜻해졌다. 어느 나라든 엄마의 마음은 위대하고 한다. 부산에 계신 엄마가 황급히 열차로 달려온 것 같은 마음이 느껴졌다. 누가 러시아를 차가운 나라라고 했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택시를 타고 올 때의 오해도 그렇고, 열차에서의 아줌마들의 정을 받고 나니, 나의 선입견만이 있었을 뿐 러시아는 아시아의 감성을 가진 따뜻한 정의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컥.”


화장실 문이 열리고 아내가 나온다. 그녀는 이미 객실에서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대단한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아파서 화장실에 간 것밖에 없는데 이 한정된 공간에서 약을 만들어내고, 과일을 모아놨으니 말이다. 그리고 낯설었던 객실 칸 사람들을 한마음으로 단결까지 시켜놓았다. 아내가 나오자 일부러 신경 안 쓰는 척 다들 자기 할 일을 하지만, 은근슬쩍 아내가 약 먹을 때까지 지켜보고 있다. 


“오빠 이게 다 뭐야?”

“응 그러니깐 이게 말이야.”


아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마리나 아줌마가 얼른 약부터 먹여라는 신호를 보낸다.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은 위험하니깐 절대 먹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사람들의 마음씨에 감동받은 아내는 고마운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약을 먹었다. 아내가 약을 먹자마자 아줌마들은 사방에서 엄마미소를 지어주신다. 


‘잊지 못할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내는 마법사.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약이 생겼다. 
바나나도 생겼다.
살구도 생겼다.
토마토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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