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꿈꾸는 사자의 도전
시안 보고가 끝나고 회의실을 빠져나와 구 대표는 신수미 과장과 호텔로 향했다.
구남철은 IT 붐이 한창 일던 21세기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이 바닥에 뛰어들어 재미를 느끼며 시간 개념 없이 일만 하다 보니 워크홀릭자로 불렸지만, 프로젝트를 하나하나 끝내면서 성장하는 성취감은 어떤 중독보다도 강한 것이었다.
제일 잘하는 일이 기획일 이었기에 가장 일찍 출근해서 일하다 보면 어느새 사무실에는 혼자 남게 되고 자신의 키보드 소리만 공간을 가득 채워져 귀에 들리는 게 좋았다.
‘휴~ 오늘도 무사히 잘 지냈군.’
책상 위의 아내와 아들이 웃고 있는 가족사진을 보며 양손을 들어 기지개를 켜고 다시 손을 키보드로 옮긴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날들을 일에만 집착하듯 지내다 보니 습관이 됐고 그곳의 중심이 돼 있었다.
그렇게 나름 산전수전을 겪으며, 강산도 변하는 긴 10년이 지나고 나서야 작은 웹 에이전시를 운영하게 되었고, 직원이 아닌 대표로 사업에 참여하게 되니 성취욕과 함께 책임감이란 것이 더 열정을 불태웠다.
구남철은 반달모양의 눈을 가진 얼굴에 호감 가는 인상과 낮은 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져서인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밝은 웃음을 가진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긍정의 느낌을 주어 기획자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다른 사람을 다뤄야 하는 리더십과 통솔력이 필요한 카리스마가 필요한 대표라는 직함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구남철이 대표가 되기 이전 회사에서 신수미 과장을 만났다.
구남철이 야근할 때 그녀는 함께 남아있곤 했는데 일이 많다기보다는 일에 매달려 매일같이 혼자 남아 일하는 구남철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져서였다.
구남철의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일하는 성실한 모습과 부드러운 말투는 기가 센, 성깔 있는 여성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치트키가 되었다.
그를 보고 잠자던 모성애가 발현된 게 신수미 과장이었다.
수미 과장의 첫 직장은 건축 사무소였다.
용역 일꾼들을 관리하며 거친 사람들을 상대하던 수미에게 새 직장에서 알게 된 남철은 다른 느낌의 부드러운 남자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가 좋아졌고 그를 따라 나와 칠구디자인에서 기획 일과 비서 일을 하며 함께 있는 것이었다.
칠구디자인의 대표가 된 후로는 식사도 거르며 일만 하는 구남철에게 김밥을 사다가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오곤 했다.
구남철은 힘겨운 순간 자신을 따르며 챙겨주는 수미의 마음 씀을 고맙게 생각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성공을 위해서 일 외에는 무신경하기로 했다.
‘앞길이 구만리다’라고 생각하며.
구남철은 직원이 아닌 대표가 된 이후 차차 양으로 승부를 보게 됐다.
IT 일을 3D업종으로 분류하는 건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업무가 쉽고 단순한 것들이어서 늦게까지 많은 양의 일을 하는 게 돈이 되는 것이었다.
신입을 데려다 적은 급여로 늦게까지 일을 시켜 산출물을 만들게 하면 주변에선 매일같이 야근하는 모습을 보고 일을 열심히 한다는 소문이 났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소문과 보이는 것만 그냥 믿으니까.’
그렇게 몇 번의 경험으로 그게 진리라고 믿게 된 구남철이다.
그러나, 이번에 대아그룹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회사를 키우려면 어쩔 수 없이 실력 있는 경력자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경력자는 자신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아서 채용하는 게 망설여지는 것이다.
스스로 대표로서의 자질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있는 구남철은 방법을 고민하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감정은 사랑이란 생각을 한다.
그는 신수미 과장이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안다. 그래서 그녀의 그 감정을 이용하고자 생각한다.
오랜 시간 지나도 일편단심인 그녀에게 느끼는 자신의 미안한 마음을 없애고 서로 믿으려면 그 이상의 관계가 필요하단 판단에 그녀를 오피스 와이프로 만들자는 위험한 생각을 한다.
자신의 성공을 꿈꾸며 여기까지 왔기에 그 욕심을 버릴 수 없어 이제 그녀가 필요한 것이다.
구남철 대표는 보고회가 잘 끝나서 기분이 좋다.
대아그룹 사옥을 나서며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한마디 건넨다.
“준비하느라고 정말 수고했어. 수미 과장, 피곤한데 우리 잠깐 쉬러 갈까?”
그러고는 호텔을 바라보며 그곳을 향한다.
신수미 과장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른다.
수년간 함께 하며 구남철 대표가 별다른 이야기를 안 해도 바로 이해했다. 그동안 함께 일하며 맞춰진 팀워크(?)다.
드디어, 그가 자신을 허락하는 것이다.
구남철은 그렇게 수년간 이 바닥을 지내며 쌓은 그 나름의 방법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한계를 느끼자, 성공을 위한 다른 방법이라 생각하며 은행에 담보를 맡기고 대출을 받듯이 사랑을 볼모로 믿음을 얻으려 물불을 안 가리고 모종의 거래를 위해 시야를 가린 경주마처럼 앞만 보며 호텔로 향하고 있다.
구남철은 그의 맹목적인 성향으로 잘못된 경험이 반복되며 그걸 진리라 믿게 됐고, 또 다른 잘못된 선택과 목표를 만들어 그가 꿈꾸던 삶의 방향과는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